나의 시 문장 148

호박꽃

호박꽃 너도 꽃이냐고 이름 갖고 비아냥거리지 마라 누가 뭐라 하든 때가 되면 때가 되면 황금빛으로 활짝 피어 벌들을 맞이한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지만 막대기를 감아 올라가기도 하고 높은 담장도 슬금슬금 기어올라 입을 활짝 벌렸다가 벌렸다가 쪼그라들며 지상의 임무를 마치는 날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툭 떨어진다 이름 갖고 우습게 보지 마라 눈길 한번 안 줘도 상관없다 모두가 좋아하는 열매를 맺고 조용히 떠나는 이 운명을 이 운명을 사랑한다

나의 시 문장 2020.09.11

5월도 간다

5월도 간다 연두색을 초록으로 바꾸면서 언제나 그 색깔로 지낼 줄 알았다 책 한권을 다 읽어도 한나절이 남고 아무리 놀아도 해가 중천에 걸리던 그 시절, 그 시절도 결국은 가더라 주름 한점 없는 햇살아래 언제나 녹색으로 지낼 줄 알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도 밥 때가 멀었고 행사를 다 챙겨도 날짜가 남아돌던 그 시절, 그 시절도 결국은 가더라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인생의 절반은 이미 그 시절에 결정이 났더라 5월, 5월을 그냥 보내지 마라

나의 시 문장 2020.05.06

월영교에서

"월영교(月映橋)"라는 이름을 보니 몇년 전 교오토(京都)에 갔을 때 걸었던 渡月橋(도게츠교)가 생각난다. 도게츠교에 갔을 때 지었던 나의 졸시(拙詩)가 생각나 이곳에 옮겨본다. 渡月橋에서 달님은 이 다리를 건널 때 무엇을 보았을까 왼쪽을 보았을까 오른쪽을 보았을까 과거를 보았을까 미래를 보았을까 눈을 뜨고 보았을까 눈을 감고 보았을까 갈 길이 멀다고 바쁜 척하던 바람도 이곳에선 쨍쨍한 햇볕을 칭칭 감고 잠시 숨을 멈춘다 달님이 다리를 건너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순간이었을까 무량겁이었을까 바람은 얼마나 오래 생각을 묶어 놓아야 달님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삼십년이 넘도록 사랑을 중얼거리는 반려자의 입술에 달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하얗게 묻히며 앞날을 물위에 그려본다 渡月橋(도게츠교)와 月映橋(월영교)를 ..

나의 시 문장 201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