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문장 150

만추 담쟁이

만추 담쟁이 제남 박 형 순 해도 짧아지고 찬바람도 불어대니 앞으로 갈 수가 없네 아무래도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 어둠을 기어코 덮어서 희망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색깔도 변하고 말라 꼬부라져서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할 것 같아 좀 더 햇빛을 박박 긁어서 더 뻗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그래도 풍우들과 어울려 한 세상 그런대로 잘 살았어 이제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준다면 내년엔 좀 더 나아지겠지 다시 또 어깨동무를 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지 이게 우리의 숙명인 것 같아

나의 시 문장 2020.10.29

낙엽 순응

낙엽 순응 제남 박 형 순 올 것이 온 것뿐이다 진작부터 이럴 줄 알았다 푸르디푸른 탱탱한 잎으로 햇빛이 오면 빗방울을 튕기면서 깔깔거릴 때는 몰랐지만 새들의 날갯짓에도 무게가 느껴졌다 한때는 폭풍도 간지러웠지만 이젠 솔바람도 아프다 높은 구름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매시간마다 쉼표를 찍어보지만 놀란 노루 도망가듯이 가을은 가고 노란 옷, 빨간 옷으로 갈아입으니 가지를 붙들고 있는 자체가 힘들다 성질 급한 애들은 이미 떠난 그 길 결국엔 뒤따라 가겠지 누구는 햇살에 기대 좀 더 버티겠지만 결국엔 뒤따라 가겠지 그러면 어떤 이는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애달프다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겠지 갈 때 가더라도 지금까지 이렇게 이렇게 지내온 것에 고마움을 뿌리자 올 것이 온 것뿐이다

나의 시 문장 2020.10.17

호박꽃

호박꽃 너도 꽃이냐고 이름 갖고 비아냥거리지 마라 누가 뭐라 하든 때가 되면 때가 되면 황금빛으로 활짝 피어 벌들을 맞이한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지만 막대기를 감아 올라가기도 하고 높은 담장도 슬금슬금 기어올라 입을 활짝 벌렸다가 벌렸다가 쪼그라들며 지상의 임무를 마치는 날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툭 떨어진다 이름 갖고 우습게 보지 마라 눈길 한번 안 줘도 상관없다 모두가 좋아하는 열매를 맺고 조용히 떠나는 이 운명을 이 운명을 사랑한다

나의 시 문장 2020.09.11

5월도 간다

5월도 간다 연두색을 초록으로 바꾸면서 언제나 그 색깔로 지낼 줄 알았다 책 한권을 다 읽어도 한나절이 남고 아무리 놀아도 해가 중천에 걸리던 그 시절, 그 시절도 결국은 가더라 주름 한점 없는 햇살아래 언제나 녹색으로 지낼 줄 알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도 밥 때가 멀었고 행사를 다 챙겨도 날짜가 남아돌던 그 시절, 그 시절도 결국은 가더라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인생의 절반은 이미 그 시절에 결정이 났더라 5월, 5월을 그냥 보내지 마라

나의 시 문장 2020.05.06

9월 초

(우리집 거실에서 9월 첫날 불암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찍었다)   (지인이 산책하며 찍은 9.4.의 모습이다)  9월 초 구월이 이렇게 다른지 미처 몰랐다 하늘도 다르고 구름도 다르다아직은 여름이라고 우기고 싶은 햇빛 아래성질급한 낙엽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지난 시절 푸른색만 고집하며 잎 크기를 자랑하기에 바빴는데하나 둘 내리막길로 굴러간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저 길이제 곧 빨강 노랑으로 옷 갈아입고 소설같은 얘기를 뿌리며 춤을 추겠지채워야 할 여백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박자는 왜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발을 세월에 맞추려 애써볼 뿐이로다

나의 시 문장 2019.09.06

월영교에서

"월영교(月映橋)"라는 이름을 보니 몇년 전 교오토(京都)에 갔을 때 걸었던 渡月橋(도게츠교)가 생각난다. 도게츠교에 갔을 때 지었던 나의 졸시(拙詩)가 생각나 이곳에 옮겨본다. 渡月橋에서 달님은 이 다리를 건널 때 무엇을 보았을까 왼쪽을 보았을까 오른쪽을 보았을까 과거를 보았을까 미래를 보았을까 눈을 뜨고 보았을까 눈을 감고 보았을까 갈 길이 멀다고 바쁜 척하던 바람도 이곳에선 쨍쨍한 햇볕을 칭칭 감고 잠시 숨을 멈춘다 달님이 다리를 건너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순간이었을까 무량겁이었을까 바람은 얼마나 오래 생각을 묶어 놓아야 달님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삼십년이 넘도록 사랑을 중얼거리는 반려자의 입술에 달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하얗게 묻히며 앞날을 물위에 그려본다 渡月橋(도게츠교)와 月映橋(월영교)를 ..

나의 시 문장 201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