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문장 148

동이 튼다

동이 튼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큼성큼 무대가 등장하며 삼바의 휘스크처럼 붉은빛들이 휘젓고 있지만 왜 이렇게 고요한 것일까 구름도 길을 멈추고 새들도 조용하고 향기도 숨을 죽인다 예술과는 거리가 멀지만 예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사자관체의 글씨처럼 강직을 넘어 자연스럽건만 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 것일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바꾸려 해도 바꿔질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이다

나의 시 문장 2022.03.04

낙엽을 밟으며

낙엽을 밟으며 서러워마라 서러워마라 밟히는 것이 어디 너뿐이더냐 밟힌다고 서러워마라 밟히면서 모두들 그렇게 살고 죽는다 나라를 세워도 밟히고 배불리 먹게 해 줘도 밟히고 국민을 주인으로 해줘도 밟히고 부자한테 돈 거둬도 밟히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줘도 밟히고 죽으면 왜 빨리 죽었냐고 밟히고 살아 있으면 왜 빨리 안 죽냐고 밟힌다 이렇게 저렇게 밟히고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것이 자연이로다 그러니 서러워마라 결국엔 밟는 사람도 낙엽이 될테니

나의 시 문장 2021.11.09

小紅花(작고 빨간 꽃)

작고 빨간 꽃 조용한 숲 속 잡초들의 자리다툼이 심한 곳에서 작은 꽃 하나가 고개를 간신히 내밀더니 바람 소리에 놀라 모습을 감춘다 억센 숨 고르는 산 중턱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키를 원망하며 파란 풀 속에서 빨갛게 숨을 죽여 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낙화를 독촉함에 서러움이 크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이렇게라도 피었음에 고개 숙이며 다가올 이별에 눈이 시리지만 좀 더 버티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계절 지나가는 슬픔이 묻어난다 七言節句 漢詩(한시)로도 써 보았습니다. 小 紅 花 紅花小笑中雜草(홍화소소중잡초) 苦育險生着山腰(고육험생착산요) 驚風姿隱待雲通(경풍자은대운통) 季去哀感非落表(계거애감비락표) 빨간 꽃이 잡초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핀 것을 보니 힘들게 자라 온 험난한 삶이 산 허리에 붙어 있구나 비람에 놀라 ..

나의 시 문장 2021.09.17

냉담을 풀면서

냉담을 풀면서 고통없이 하느님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느님 보기 힘들다고 우기며 발길을 뚝 끊고 지냈더니 성당 가는 길이 잡초로 우거져 보여도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바뀌는 계절 속에서 십자고상을 보고도 못 본 척 기도서와 묵주를 서랍 속에 가둬두고 세심의 시간을 묻어둔 지 몇 해던가 하얗게 보이는 머릿속을 피 흘리며 문신으로 채우던 날 젊어졌다고 다시 보고 또 보며 고통없이 젊어질 수 없음을 안 그날 영세받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다 고통없이 하느님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이상으로 기쁨과 영광 있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바보보다 더 큰 바보는 없기에 굳게 닫아놓았던 빗장을 열고 당신의 모습으로 살리라고 다짐하며 두손을 가지런하게 모은다

나의 시 문장 2021.06.18

시멘트 바닥의 민들레

시멘트 바닥의 민들레 제남 박 형 순 왜 이런 곳에 뿌리를 내렸냐고 묻지 마라 왜 이렇게 사냐고 탓하지 마라 소쩍새 우는 사연 어찌 다 말하랴 멀리서는 볼 수 없고 가까이 다가서도 보기 힘들며 자세를 낮추어야 겨우 볼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웅크려 자리 잡았으니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다고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쳐다보지 마라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를 맞다가 언제 뽑혀 나갈지라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나 꽃은 한순간이다

나의 시 문장 2021.04.12

기울어진 나무

모던포엠사와 영상시를 6편 제작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번이 그 2번째입니다. 이 시도 오래전 발표된 시로 제가 등단의 문턱을 넘게 해 준 시입니다. 수년 전 태안에 갔을 때 발코니에서 기울어진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바닷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나무들이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실 영상에 기울어진 나무들이 자주 보였으면 하는데, 역시 이런 것도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은 비용으로 더 잘 만들 수도 있지만, 열악한 잡지사의 운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조금 넓혀봅니다. youtu.be/PasyGmVCxgg

나의 시 문장 2020.11.22

만추 담쟁이

만추 담쟁이 제남 박 형 순 해도 짧아지고 찬바람도 불어대니 앞으로 갈 수가 없네 아무래도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 어둠을 기어코 덮어서 희망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색깔도 변하고 말라 꼬부라져서 여기서 그만 멈춰야 할 것 같아 좀 더 햇빛을 박박 긁어서 더 뻗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그래도 풍우들과 어울려 한 세상 그런대로 잘 살았어 이제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준다면 내년엔 좀 더 나아지겠지 다시 또 어깨동무를 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지 이게 우리의 숙명인 것 같아

나의 시 문장 2020.10.29

낙엽 순응

낙엽 순응 제남 박 형 순 올 것이 온 것뿐이다 진작부터 이럴 줄 알았다 푸르디푸른 탱탱한 잎으로 햇빛이 오면 빗방울을 튕기면서 깔깔거릴 때는 몰랐지만 새들의 날갯짓에도 무게가 느껴졌다 한때는 폭풍도 간지러웠지만 이젠 솔바람도 아프다 높은 구름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매시간마다 쉼표를 찍어보지만 놀란 노루 도망가듯이 가을은 가고 노란 옷, 빨간 옷으로 갈아입으니 가지를 붙들고 있는 자체가 힘들다 성질 급한 애들은 이미 떠난 그 길 결국엔 뒤따라 가겠지 누구는 햇살에 기대 좀 더 버티겠지만 결국엔 뒤따라 가겠지 그러면 어떤 이는 아름답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애달프다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겠지 갈 때 가더라도 지금까지 이렇게 이렇게 지내온 것에 고마움을 뿌리자 올 것이 온 것뿐이다

나의 시 문장 2020.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