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 부끄러움을 어찌할까?

헤스톤 2023. 8. 27. 15:43

지난 광복절 경향신문에 梅泉(매천) 黃玄(황현) 선생과 관련한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중 아래의 글을 읽고 가슴이 콱 막혔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순절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1910년 9월6일이었다. 경술국치(8월26일) 소식이 뒤늦게 매천 황현(1855~1910)이 은거하던 전남 구례에 전해졌다.
이때 동생(황원·1870~1944)은 형(매천)에게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왜 ‘아무개 공(某公)’ 같이 인망(人望)이 두터운 분이 죽지 않고 있는거냐”고 책망했다. 매천이 씩 웃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면서 남이 죽지 않는다고 뭐라 해서 되겠느냐. 나라가 망한 날에는 사람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틀 뒤인 9월9일 새벽 매천은 홀연히 붓을 들어 ‘절명시’ 4편과, 유서(‘순국의 변’) 등을 써내려갔다.

 

여기에서 "인망이 두터운 아무개 공(某公)"을 읽는 순간 그 '아무개 공'이 나의 고조부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천 선생의 절친인 錦士(금사) 朴恒來(박항래) 공이다. 나의 고조부는 구례 군수 시절부터 매천 선생과 글을 주고 받으며 친하게 지냈다. 물론 신문에 난 기사라고 해서 사실과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술국치일도 8월29일인데,  8월 26일로 되어있고, 이 신문의 마지막 부분의 기사 내용(이름도 박창래로 되어 있고 옥중순국했다는 부분 등)은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매천 선생의 작고일도 조금씩 다르다. 백과사전엔 9월 7일, 기사엔 9월 9일, 또 어느 곳엔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물론 일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천 선생이 그 유명한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반면 나의 고조부는 자결하지 않았다.

 

매천의 절명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을 옮겨본다.  

 

황현(黃玹)의 한시, 절명시<매천집>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어렵기도 하구나

 

▲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용신(1850~1941)이 그린 매천 황현(1855~1910)의 초상화(보물). 매천은 “국가가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는 유언을 남긴 뒤 자결 순국했다.(매천 황현 선생 후손 소장)

 

(매천 선생은 글도 잘 쓰고 글씨도 잘 썼다. 위 사진에서 위에 적은 절명시가 보인다.)

 

다시 계속해서 신문 기사에 있는 아래 내용을 보며 부끄러워진다. 한편 당시 고조부께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착잡해진다. 

 

매천은 홍만식·민영환·조병세의 자결 순국 기사를 써내려가면서 본인 스스로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결심을 한 것 같다.
1906년 6월 매천의 절친이자 독립운동가 박항래(1853~1933)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순절한 분 들 외에…그 밖의 대소 관료 중에는 한 사람도…자신의 의지를 표한 자가 없었습니다. 금사(錦士·박항래의 호)도 그랬는데 그 밖의 용렬한 관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매천은 자성부사와 구례군수, 여산군수를 지낸 박항래에게 “국록을 먹고 있는 관원이 왜 자결하지 않으냐”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관리들조차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참고로 금사 박항래는 1853년생이고, 매천 황현은 1855년생이다. 위 내용은 매천 황현이 친구인 금사 박항래를 꾸짖는 말이다. 내가 꾸지람을 듣는 듯하여 얼굴이 붉어진다.

위 기사에서도 약간 거슬리는 부분은 있다. 고조부는 종2품(가선대부)이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공직에서 퇴임하고 시골(금산 제원)에 정착하고 있었다. 당시 親日(친일)이 나라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된다는 논리로 이완용의 입각 권유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물러나 있을 때이다. 따라서 위의 1906년은 고조부가 이미 야인 신분으로 국록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만 과거 국록을 먹었던 자로써 나라가 망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매천의 자결 이유를 보면 더 숙연해진다. 대부분 다 아는 내용이지만, 기사 내용을 그냥 인용한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우선 ‘순국의 변’을 보라.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매천집>)

그렇다. 매천은 56살이 되도록 벼슬에 나간 적 없는 선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포의의 선비로서 굳이 죽을 의리는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곧 천고의 명언이 나온다. 

“500년 지속된 나라가 망했는데, 따라 죽는 선비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얼마나 통탄스럽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생 황원(1870~1944·독립운동가)이 전한 매천 황현의 자결순국 이야기에 보면, 동생이 극약을 마신 형의 목숨을 구하려고 해독제를 쓰려했지만 매천은 “세상일이 이쯤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고 약사발을 엎어버렸다.

 

 

  (고조부 금사공의 칠순 존영)

 

 

나는 금사 고조부를 뵌 적이 없다. 나보다 약 100여 년 전에 태어나셔서 내가 태어나기 약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매천야록에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나오지만, 큰 일을 하셨다는 소리는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 후손들 중 그만한 인물이 없다는 동네어른들의 말도 많이 들었다. 고조부가 대단한 사람이었음은 틀림없다. 인물 천냥, 말 천냥, 글 천냥이라고 해서 삼천 냥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당시 천냥은 엄청 큰 숫자이었던 것 같다. 고조부는 글을 잘 짓는 사람이었으나, 아쉽게도 고조부가 쓴 글들이 후손들의 잘못으로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긱종 기록에는 그저 유명한 매천 황현 선생과 관련된 글만 보일 뿐이다.

매천 선생의 친구는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창, 김택영 등과 꾸준한 교유관계가 이어졌다.
학문을 연마할때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집에서 가까운 풍광이 수려(秀麗)한 천년고찰(千年古刹) 천은사(泉隱寺) 수홍루(垂虹樓) 난간위에서 운조루(雲鳥樓) 5대 주인 유제양, 소천 왕사찬, 해학 이기, 구례군수를 역임한 시 잘짓는 금사 박항래(錦士 朴恒來)등과 어울려 시를 읊고 시국(時局)을 논했다.
출처 : 뉴스서치(https://www.newssearch.kr)

 

매천 선생이 시인, 문장가, 역사가, 우국지사로 소개되곤 하는데, 시 잘짓는 금사 박항래의 글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면 그 평가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더 아쉬운 것은 잘 쓰는 글 솜씨로 매천 선생의 절명시같은 시 한수 남기고 행동으로 옮겼다면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매천선생이 1910년 9월 10일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조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초야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미래의 희망을 보며 사는 것이 나은 것인지,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은지 당시로서는 판단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고조부도 매천선생처럼 자결했다면 그와 비슷한 역사의 인물이 되었을까?

매천 선생이 편지에서 고조부가 자결하지 않은 것을 탓했다는 글을 보며 후손으로 착잡한 마음이 되어 고조부의 변명을 써 본다. 일제치하에서 힘들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1930년대로 돌아가서 고조부의 심정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나열해 본다.(오래전 썼던 글로 이 문장은 고조부의 글이 아니고, 내가 고조부의 심정이 되어 쓴 글이다.)

 

 

후 회

 

차라리 자결이나 할 걸

치욕스러운 하늘을 보고 사느니

일찌감치 땅속으로 들어가

독립의 거름이나 될 걸

나라가 망했는데

벼슬이 무슨 소용이고

가르치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글 줄이나 읽는 사람으로

목숨부지가 최선은 아닐 터

후학들을 돌보면서

사반세기 더 밥 먹는다고

어둠이 걷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국치의 소식이 들리는 날

매천 친구처럼

절명시나 읊으면서 사라졌다면

구차하게 후회도 없었을 것을

 

 

나는 고조부와 같은 시대의 지성인도 아니고 그럴듯한 벼슬을 한 사람도 아니며 후세의 사람을 가르칠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고조부의 마음을 대변할 수는 없다. 다만,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을 참조하여 나의 좁은 소견으로 위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날그날 어떠한 결정을 하며 살아야 될까를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어쩌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각종 문헌에 있는 고조부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기록한 책 - 직도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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