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괴로움을 밑거름으로

헤스톤 2023. 10. 3. 18:16

 

지금까지 나의 삶을 돌아볼 때 괴로움이라는 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물론 기쁨이나 즐거움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지만, 괴로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었다. 물론 괴로움에 있어서 언제나 그 원인 제공자들이 존재하곤 하였지만, 그 원인을 녹이거나 무시해버리지 못한 나 스스로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나를 생각해 보면 후회가 참 많은 삶이다. 수시로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원하는 방향과 많이 벗어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큰 후회로 남는다.

 

어린 시절부터 대충 생각나는 것만 그려 보아도 아쉽게 여겨지는 선택들이 떠오른다. 우선 중학교 입학 시 잘못된 선택은 고등학교로 이어졌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한 시간들이었다. 그런 노력으로 당시 나의 실력은 서울의 일류 대학교 사회계열에 진학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때 우리 집의 경제 상황이나 자식을 키우려는 부모님의 의지가 있었다면 나의 길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지난 시절에 대한 가정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누구를 탓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이 나의 용기나 의지가 부족했던 탓이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대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게 막은 아버지도 아니고, 대학교 2학년 마치고 군에 갈 수밖에 없었던 집안 형편도 아니다. 은행이라는 직장에 들어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 몇 명의 직장 상사들도 아니고, 사고를 쳐서 나의 길을 막은 몇 명의 부하 직원도 아니다. 특히 W 지점장 시절 지점을 희생시키게 하였을 뿐 아니라, 나의 인사고과에 빨간 줄을 그어 앞길을 막은 L 모 본부장도 아니고, 본점 부장으로 못 들어오게 막은 K 이사도 아니다.

이렇게 쓰면서 위의 "아니다"라고 나열한 것들은 사실 반어법의 언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먼저 결론을 말했듯이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살고 있음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약 일류 대학교에 들어갔다면 건방이 하늘을 찔러 제대로 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정의 돌봄으로 군에 늦게 가고 고시에 합격하였다면 보통 사람을 무시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뒤 출세하여 국회의원이 되거나 고위 공직자가 되었다면 더 큰 좌절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은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임원이나 그 이상의 높은 자리로 갔다면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하거나 일찍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의 "모른다"라고 나열한 것도 반어법의 표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렇게라도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뭉개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차분히 내려놓자. 더 이상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지 말자. 차라리 은행이라는 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은행 생활 29년 중 9년 이상을 지점장으로 있었던 것에 감사하자. 가지 않았거나 가지 못한 길을 부러워하지 말자. 더 이상 나를 괴롭히면서 살지 말자. 사실 난 지금 나를 더 괴롭히지 않으려고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혹 자신 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덜어본다. 지금 나는 "Beethoven(베토벤)"의 소나타 월광 3악장을 우연히 듣고 있다. 왜 그런지 이 음악이 머리를 팡팡 때리기도 하고, 찌르르 몸을 떨게도 한다. 그리고 깔끔하게 갑자기 훅 마무리되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베토벤"을 악성(樂聖)으로 존경하지만 사실 "베토벤"처럼 불행한 삶을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귀머거리였고, 반려자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감기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57세에 생을 마쳤다.

그러면 방금 들은 이 유명한 "월광"은 어떻게 작곡된 것일까?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상기해 보면 이렇다. 젊은 청년 '베토벤'은 '줄리에타'라는 여성을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아가씨”라고 "줄리에타"를 표현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이 사랑하고, '베토벤'을 사랑했다던 '줄리에타'는 2년 뒤에 발레 음악가와 결혼을 한 뒤 이탈리아로 떠나버리고 만다. 그 이유는 가난하고 나이 많은 '베토벤'을 반대하는 '줄리에타'의 아버지가 그녀를 다른 사람과 결혼을 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에 실의에 빠진 '베토벤'은 '월광'을 작곡 했다. 이래서 '루체른' 호수에 비치는 달빛을 떠올리게 하는 '베토벤'의 소나타 "월광"이 탄생한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랑이 해피 엔딩이었다면 이 세상에 "월광"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괴로움속에서 나는 무엇을 탄생시켰는가? 졸작의 詩(시) 몇 편이 있다고 하지만, 달빛이나 별빛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과거의 괴로움을 씹으며 山光(산광)이나 水光(수광)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나는 지금 천천히 쓰고 있는 소설을 훑어보며 조금이라도 빛이 날 수 있도록 다듬고 또 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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