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예 횡설수설(2)

헤스톤 2022. 8. 17. 08:00

(나의 예서 작품으로 2022년 무궁화 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 수상)

 

2. 서예의 본질  

 

(1) 동양의 보석

 

중국의 노신 선생이 말하길 "서예는 동양의 보석이다." "그것은 시는 아니지만 시의 운치가 있고,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이 있고, 춤은 아니지만 춤의 리듬이 있고, 노래는 아니지만 노래의 멜로디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속에 서예의 본질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본다. 서예에는 시의 운치, 그림의 아름다움, 춤의 리듬, 노래의 멜로디가 있다는 것이다. 詩(시)에 노래가 있고 그림이 있는 것처럼, 서예도 비슷하다. 書藝(서예) 속엔 詩(시), 畵(화), 舞(무), 歌(가)가 있다. 이런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예라고 하면 일단 긍정적인 생각이 들며, 서예가도 시인처럼 좋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좀 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서예에 무관심한 사람은 있어도 서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2) 서예와 붓글씨

 

대개 서예라고 하면 붓글씨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은 분명하게 이를 구분한다. 書藝(서예)는 단순하게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고 글자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예를 하면 정서적으로 좋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 등의 일반론에 머무르게 되면 서예의 참맛을 볼 수 없다. 사실 글씨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단순하게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그동안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것이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배운 단계로 3가지를 말하면 이렇다. 기초적인 줄긋기, 점찍기, 삐침, 파임 등을 연습한 이후에는 글씨를 쓰는 첫 단계로 寫書(사서)부터 시작한다. 즉, 남의 글씨를 흉내 내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비문이나 유명 서예가들이 남긴 글씨 혹은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체본을 그대로 베끼며 연습한다. 서예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개 이 수준에서 우열을 가린다. 사서 단계가 지나면 臨書(임서)로 넘어간다. 임서는 서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단계로 글자의 특성을 집어내서 쓰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사람마다 용어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意臨(의임)이라고 한다. 이는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개성 혹은 멋이나 맛을 글자에 담는 것이다. 글자를 갖고 노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씨는 호랑이가 웅크린 듯하고, 어떤 글씨는 용이 비상하는 듯하고, 어떤 글씨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보는 이가 감동을 받게 한다. 이런 것에서 붓글씨와 서예는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3) 詩書畵(시서화)

 

書藝(서예)는 흔히들 묶음으로 말하는 詩書畵(시서화)의 가운데에 자리한다. 그런 탓으로 서예는 시이면서 그림이고, 그림이면서 시라고 하며, 시와 그림이라는 두 영역을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서화는 서로 깊은 관계 혹은 서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광의적 개념에서는 혈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시에 노래나 그림이 있어야 하듯이 서예엔 시나 그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서예라는 것이 시나 그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표현 도구가 다르다. 시나 그림, 음악은 수많은 언어, 수많은 색, 수많은 음률로 표현을 하지만, 서예는 먹물로 표현할 뿐이다. 오직 먹의 濃淡(농담)이 있을 뿐이다. 물론 大小 長短 圓方 强弱 등이 있고, 먹의 潤渴(윤갈)이 있지만 모두 먹물을 사용한 붓 놀림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예는 한없이 단순하다. 그 단순함 속에서 수많은 언어나 색 혹은 곡을 표현한다. 오직 붓을 사용한 먹물로 어떻게 혼을 투영시키느냐에 따라 작품은 살아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은 것이 되기도 한다.

 

(4) 본질관련 일화

 

서예의 본질과 관련하여 "松都三絶(송도삼절)"의 한 축인 화담 서경덕과 관련된 일화 하나를 올리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느 날 아침, 화담은 새 소리에 잠이 깼다. 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급히 먹을 갈고 鳥鳴(조명)이라는 글씨를 단숨에 썼다. 새소리가 하도 맑아서 저절로 글씨가 써졌던 것이다. 그런데 붓을 놓고 보니 글씨가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다음날, 중국에서 온 사신이 그를 만나러 왔다. 사신은 그 글씨를 보고 깊이 감탄하며 작품을 탐냈다. 의아한 서화담은 그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 삐침이 부실한 부분을 찾아내 보강했다. 사신이 밖에 나간 틈을 타 고쳐놓은 것이다. 그런데 밖에 나갔다 돌아온 사신은 글씨가 고쳐진 것을 발견하고 탄식했다. 

 "애초 당신의 글씨엔 아침에 갓 깨어나 허기진 새의 울음이 잘 표현돼 있었다. 그런데 어찌 힘이 들어가게 다시 고쳤단 말이오. "

그제야 화담은 새의 속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드러나 보이는 현상만으로 글씨를 쓴 것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겼다 한다. 서예의 본질을 잘 설명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 내고, 대상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예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붓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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