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무소
제목을 '동사무소'라고 달고 보니 갑자기 '동방불패'라는 말이 생각난다. 당연히 '동방불패(東方不敗)'라는
무협영화가 떠오른 것은 아니고, "동사무소 방위는 불쌍해서 패지도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서 혼자 웃어
본다. 동사무소 방위가 불쌍하다는 것은 당시 여러가지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사실 나는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동사무소 방위가 무척 부러웠다. 출퇴근 하면서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고, 무엇
보다 그 기간이 짧아 큰 공백없이 공부를 할 수 있으니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
'만약에'라는 조건을 달면 현재 크게 달라진 모습이 그려 지겠지만 정말 만약에 나도 동사무소 방위로 국방
의무를 마칠 수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갈
수 없었던 길이기에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너무 오래전의 일이기에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만약
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며칠만이라도 뒤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자동차 사고를 일으키기 전으로 말이다.
얼마 전 나는 커다란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곧바로 운전을 했으니 운전경력 26년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운전하면서 교통위반 범칙금을 낸 기억도 가물거리는데 정말 내가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접촉사고를 당한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경미한 접촉사고도
없었던 내가 신호위반을 하면서 오토바이와 부딪쳐 피해자가 구급차에 실려 가게 한 경우는 처음이다.
살면서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피해자를 무조건 살려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기절해 있었고 나는 가슴을 누르면서 깨어나길 빌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은 왜 대부분 방관자로 있었던 것일까. 주변의 주유소 직원에게 부탁하여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였다. 피해자가 눈을 떴을 때 비로소 나도 숨을 쉴 수 있었고 물을 찾을 때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피해자가 크게 다치지 않았고 젊은 탓으로 금방 일어날 수 있었음을 천운으로 생각한다.
이런 나의 사고 소식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다. 내가 신호위반을 하고 사고를
일으켰다고 하니 농담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누구는 큰일날 뻔
했다고 하면서 "서두르지 않아도 빨리 가버리는 가을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다니라"고 충고한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는 보험사에서 다 알아서 하니까 신경쓸 것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부터 나중에 개인합의도 해야
하니까 피해자에게 얼굴도장을 자주 찍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피해자나 보험사를 상대로 당근과 채찍
이 필요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누구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동기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위로가 되기는 하였지만 나와 같은 직장에서 약 30년을 같이 근무하여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입행동기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입행동기의 단체 카톡방에 나의
상황을 전하였더니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온다. 사고와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다. 무엇보다 위로와 안심을 시켜 주려는 통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여러 통의 전화를
받다보니 마음이 편해지고 괜히 힘이 난다. 역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것 같다. 만약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누구는 아무 걱정말라면서 이쪽 전문가인 자기 후배나 아들로 하여금
전화하겠다는 동기도 있고, 경찰인 아들 친구 통해서 알아 봤는데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는 동기의 전화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찬 바람에 뒹굴고 있는 낙엽을 보니 더 쓸쓸해진다. 어느덧 우리는
실무적으로 후배나 아들에게 밀려나 있다고 생각하니 낙엽이 그냥 낙엽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입행
동기들 모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릇파릇했는데 이제는 해가 서쪽으로 많이 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동기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같은 직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동기들이 곁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 지난 번 모임에서 모 동기의 건배사가 생각난다. '동사무소'
라는 건배사이다. "동기들을 사랑함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라는 내용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기들과 자주
연락하고 만나면서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면서 자주 만나자"고
'주전자'를 외친 동기도 있었다.
사실 "동사무소"의 '동'자엔 '동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반자'도 있다. "동반자를 사랑함이 무엇보다 소중
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동창이나 동무도 있고 동생, 동서, 동인, 동족, 동지, 동호인, 동향인도 있다.
지금 나는 속으로 '동사무소'를 여러번 되뇌어 본다. 그나저나 재미로 보는 오늘의 운세에 "동쪽으로 가면
얼음을 밟고 미끄러질 가능성이 있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 '동쪽'으로 산책을
가야 할지 말지 잘 모르겠다. 그냥 '동사무소'이다.
(많이 부셔졌던 나의 자동치는 이제 수리가 되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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