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상대한 날
많이 참았다. 정말 많이 참았다.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언제 주겠다는 약속도 받지 못한 상태로 퇴직한지
4개월이 지났다. 무엇보다 재직 직원의 월급은 얼만큼 챙겨 주면서 퇴직 직원은 '나몰라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퇴직 직원들이 고통스럽게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내고 각종 법적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무시하는 행위가 못마땅하였다. 그리고 퇴직
직원 중에서 나 혼자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내지 않는다고 실추된 회사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기에 나도 참다 참다 진정을 내고 말았다. 그렇다고 사업주를 처벌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체불임금에 대한 확인서를 받아 놓아야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업장 경매에서
최우선 변제금이라도 받아낼 수 있고, 그 외 채권회수조치를 위한 권리 주장을 용이하게 할 수 있기에
부득이 내게 된 것이다.
노동청이라는 곳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람도 처음 만났다. 담당 감독관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이지만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 강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명패에 '특별사법경찰관'
이라고도 쓰여 있다. 때에 따라서는 악질 사업주를 모시러(?) 가기도 한단다.
"박형순씨 본인 맞으신가요? 신분증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 신분증~ 여기 있습니다."
"박형순씨는 진정인이면서 또 회사측에서 나온 사람인데, 맞습니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내가 나를 상대하고 있다. 내가 회사를 상대로 진정을 내고 , 내가 다시 회사측의
사람이 되어 나에게 회사측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사실 퇴직이라는 것은 입사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누구라도 그렇게 유쾌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일정
한 규칙에 따라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 또는 순전히 자의로 퇴사를 한 경우라도 기분이 별로일텐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한 경우라면 좋은 감정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서운한 점
이 있을 수 있고 괘씸한 생각도 가질 수 있다. 더군다나 퇴직금은 말할 것도 없고 밀린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조금 남아 있던 정마저 떨어질 즈음이 되었다.
회사가 더 어려워져서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왔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내가 받을 임금 및 퇴직금 수령은
이제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이다. 그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나 보다 조금 더
일찍 퇴직하고 전기제품 도매업을 운영하고 있는 P사장으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국에서 동종업종을 경영하고 있는 C사장이라는 사람이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P사장은
그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줘도 괜찮겠느냐고 하면서 은근히 통화하기를 바라고 있기에 상관없다고 하였
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에 뜬다. 벨소리만으로도 C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이사님! 저 C입니다. 박이사님에 대하여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회사의 상황에
대하여 다른 직원들보다 비교적 많이 아시고.. "
이 회사를 이대로 망하게 해서 되겠느냐는 것으로 나의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함께 힘을 모아
회생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참으로 고마운 말이다. 통화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우리집으로 찾아와 투자 의사와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하여 장시간 말하면서
함께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몇몇 사람이 회사의 창구가 되어 달라고 하면서 나의 봉사(?)를 요청하고 무엇보다 주채권자들의
요청이 있어 승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상태는 회사에 다시 입사한 것도 아니면서 그 회사의
CFO임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낸 '퇴직자 박형순'을 회사의 'CFO 박형순'이가
상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날 내가 나를 처음으로 상대한 이후 몇 명의 퇴직자들을 상대하면서 오후가 다 지나갔다. 진술서 등을
작성하면서 1인당 약 30분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현 회사 상황 및 앞으로 예상되는 일들에 대하여
회사측 입장에서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위로도 해주며 이러저러한 법적절차를 해도 좋다는 조언을 퇴직자
들에게 해 주었다. 같은 사무실내의 다른 곳에서는 큰 소리도 많이 나는데 나와 상대한 회사 직원들은
모두 고개만 끄덕거린다. 근로감독관은 ‘이 회사 직원들은 하나같이 착하다’고 한다. 착하다는 말이 정말
좋은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몇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슬슬 나 나름대로 여유도 생긴다. 감독관이 퇴사자
를 상대로 조서를 작성할 때는 옆자리의 다른 감독관 앞에서 벌어지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성폭행을
당해서 진정을 냈다는 젊은 여성의 눈물 섞인 하소연도 들어오고, 퇴직한 종업원이 사업주와 막말로
싸움을 하는 광경도 들어온다. 그런데 희한하다. 내가 상대한 직원들은 모두 순하다. 너무 유순해서 내가
더 화가 난다.
내가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을 상대하고 노동청 문 밖을 나서니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날씨마저
나의 기분을 우울하게 한다. 낙엽위로 내 얼굴과 퇴직자들의 얼굴이 있다. 내가 나를 상대한 이날 왜
이렇게 발길이 무거운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나를 얼마나 상대하며 살아왔는가도 뒤돌아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라는 말이 나를 위로한다.
이날도 '어떻게 하면 회사를 살릴 수 있을까'를 놓고 채권자들과 밤 늦게 까지 토론하다가 퇴근 후
이날 낮에 있었던 일을 집사람에게 말하며 재입사 여부를 놓고 고민중이라고 했더니 집사람은 말한다.
"밀린 임금은 언제 주고 앞으로 월급은 얼마 준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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