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고구마를 먹을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무슨 도(道)라도 닦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껍질을
얇게 벗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오른다. 사실 고구마뿐만 아니라 감자 껍질을 벗길 때도 그러셨고
모든 음식을 정성으로 대하셨다. 음식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씨 뿌리고 거름주고 추수하고 씻고 말리고
찌고 하면서 수고하신 모든 사람들과 햇볕이나 바람과 비 등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매일 책 읽고 글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약간의 공부라도
할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면 더 많은 글을 남기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아버지의 마지막 저서인
"차마 어쩌지 못한 인생"이란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만약 큰아버지가 어려서 일본으로 완전히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의 장남역할을 하며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TV 드라마를 보다 보면 뒤바뀐 인생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특히 주인공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무슨 이유인지 일찍 자기 부모와 헤어져 가난한 집에서 힘들게 자라거나 원수의
집에서 어렵게 성장과정을 거치곤 한다. 그리고 또 원수 집안이거나 매우 가난한 집의 딸은 무슨 이유로
팔자가 바뀌었는지 부와 권력이 있는 집에서 친딸이상으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기득권을 빼앗
기지 않으려고 악역으로 나오는 그런 내용들이다. 어쩌면 그런 내용들이기에 드라마가 되고 영화가
되겠지만, 만약 드라마처럼 이렇게 뒤바뀐 인생들이 많으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재미는 있을지 몰라
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해질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군대때문에 형과 동생이 바뀐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내용도 있었고, 어느 어머니는 이름을 바꿔 다른 사람
으로 살아야 했던 "기막힌 이야기-실제상황"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고구마 껍질을 벗기다가 오늘은
웃음이 나온다. 어제 저녁을 같이 먹으며 들려주었던 P회장님(약 5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로 최근
에는 거의 매일 만나는 모 업체의 경영자)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착오로 봉투를
잘못 전달하여 그 이후 고구마를 실컷 먹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어느 날 두 곳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날짜도 같고 결혼식 장소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개의 봉투를 만들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한 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친하게 알고 지내는 후배
이었다. 모교인 K대학교 동창회장도 전임자와 후임자로 인수인계를 하였고 부부끼리도 자주 만나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꼭 참석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 집은 다르다. 지난 달
이업종교류회의 골프모임에 처음 참석한 사람으로 그때 알게 되었을 뿐인데 청첩장을 받게 되었던 것
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청첩장을 받으니 기분도 그냥 그랬다. 만약 장소만 멀리 떨어져
있거나 시간차만 많이 났어도 참석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친하게 지내는 후배의 자녀 혼사에서 지인들과 식사도 하고 나왔다. 그리고 그냥 예의상 참석하는
사람의 자녀 혼사에서는 얇은 봉투를 주면서 눈도장만 찍고 나왔다. 사실 뒤의 사람의 혼사에 참석은
커녕 부조를 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 봉투를 주었다는 자체가 좀 아깝다는 생각
까지 들었다. 대부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 많이 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어떤 이에게는 부조를 하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 말이다. 예를 들어 나의 애경사에는 코빼기
도 보이지 않던 사람으로부터 청첩장을 연거푸 받다 보면 그럴 것이고 가깝다거나 좋은 기억은커녕 괘씸
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애경사 문자를 받으면 망설여지기도 한다. 그는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의 혼사에 며칠 전 명함을 주고 받았다는 죄(?)로 마지 못해 부조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음 날 뒤의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저 ㅇㅇ인데요. 사실 청첩장을 보낼까 말까도 망설이다가 보냈고, 모른체 하셔도 그만인데
어제 직접 오셔서 너무 큰 금액의 축의금을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받고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답례상의 통화로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마 몇 박스를 보내며 지난번 자식의 혼사에 큰
후의를 베풀어 주셔서 고맙다는 메모가 있었다. 사실 예의상으로 작은 액수의 돈을 넣었을 뿐인데
자꾸만 '너무 큰 돈'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렇다고 가깝게 지내는 후배한테 '너 나한테 얼마
받았느냐'고 물어보기도 뭣하고 해서 물어보지 못했다. 원래 돈이란 한번 주머니를 떠나면 다시 돌아
오기 힘든 것으로 이미 봉투는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난 열차처럼 혼주의 손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부터 그에게는 매년 많은 양의 고구마가 온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은 거액(?)의 축의금을
받은 그 사람이 보내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귀농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올해도 고구마를
잔뜩 보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서로 왕래하며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얼마 전에 봉투가 바뀐
사실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바뀐 봉투를 받은 후배가 내색은 하지 않고 지금도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좁쌀 선배라고 욕했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로 인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매년 고구마를 실컷 먹게 된 것이 큰 수확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뒤바뀐 봉투로 인해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그분들이 생각나 고구마 껍질을 정성스럽게 벗기며,
무슨 이유가 되었건 바뀐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드라마처럼 어느 정도의 고충을 겪은 후에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