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丙申年)이 달려가면서 얼었던 땅이 녹고 봄의 기운이 피어 오르니 병신년생인 나로써는 운동장을
한바퀴 돈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병신년이란 어감이 그런 탓으로 마음에 드는 용어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
병신년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았다. 병신(?)처럼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어쩌면 병신년을 맞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세월은 기다리지 않아도 이렇게 당당하게 와서 해가 뜨고
나무에 물이 올라 성질 급한 놈들은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다하게 이룩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 그동안 누가 내 나이를 물어보면 아직 50대라고 했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다. 흔히
말하길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면서 '이제 시작'이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큰 고개를 넘은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몇 십 년 전과는 많이 다르다. 약 반세기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환갑이라고 동네잔치를 하고 사진을
찍은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보니 차이가 많이 난다. 요즘 육십은 옛날과 달라서 경로석 근처는
커녕 어디가서 늙었다고 말도 못한다. 내 모습을 보니 깊게 패인 주름살도 보이지 않는다. 머리는 별로
이지만 머리 색깔만큼은 우성으로 물려 받았는지 흰머리도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 허전하다. 얼마 전에는
고교 동창모임에서 당시의 교복을 입고 고등학생이 된 기분을 내 보았지만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웃고 떠들었지만 시간이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갑의 언덕에서 바라보니 여러 번 어렵게 지나온 많은 고개들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출근길을 따라 가다 보면 몇 개의 큰 고개가 있다. 그 고개를 넘을 때마다 지나온
인생의 고개들이 보이기도 하고 앞으로 있을 고개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먼저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덕릉고개가 있다. 이제는 터널 공사가 완공되어
앞으로는 이 고개를 넘어가는 일도 많지 않을테지만 지난 달까지는 계속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고개
이름에 대하여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유래를 보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소인
덕릉이 고개 동쪽에 있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이 고개에서 얼마나 많은 교통사고가 있었는지 모른다. 절대로 속도를 내서는 안되고
노면이 조금이라도 미끄럽다고 생각되면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 지나온 인생 고개도 마찬가지다. 운전
하면서 잘난 체 하고 속도를 내다가는 그냥 한순간에 가는 수도 있다. 이런 고개에서는 절대로 앞에 가는
사람을 추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아무리 답답하여도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참지 못하고 추월하려다 사고가 나서 결국 낙오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앞서 가려고 하다가
망신당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자기 상사가 조금 모자라게 보여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좀 더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출근길을 따라 의정부 민락동에서 축석령 휴게소쪽으로 가다 보면 또 큰 고개가 나온다. 넘어갈 때 자동차
도 힘이 많이 들어 간혹 큰 트럭들이 올라가지 못하고 서 있는 경우도 있다. 감당하지 못할 짐은 내려 놓고
가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살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런 고개 역시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가다가 이런 고개가 나오면 더 조심해야 한다. 이런 길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올 때나 비가 많이 내릴 때
교통대란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조금 앞서 가려고 하다가 영원히 먼저 갈 수도 있다. 직장생활에서 겸손하지
못했던 지난 날이 떠오른다. 동기들보다 조금 앞서 나가며 우쭐대다가 힘이 빠져 주저앉게 되고 말았던
과거가 떠오른다. 자기가 질 수 있는 짐만 지고 천천히 가도록 해야 한다.
누구나 가다보면 이런 고개를 만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만나게 되는 고개를 탓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순탄한 길만 가고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순탄한 인생은 재앙이다"라는 말도 있다. 결국 성숙과는
거리가 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말했듯이 속도보다도 방향이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질주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아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 특히 갈림길에서는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또 고개를 넘어갈 때 뿐만 아니고 평탄한 길에서도 동행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다. 혼자보다는 함께가
좋다. 이 세상을 혼자 살라고 하면 아무 재미도 없을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람 인(人)자가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내가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더라도 갈 수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어두워도 갈 수 있다. 동행의 기쁨이란 것이 있다. 앞으로의 고개는 여러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넘으리라. 어차피 인생이란 함께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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