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8

헤스톤 2023. 5. 25. 10:37

 

8. 비굴의 모습

 

 

   지난 약 10년 동안 회사가 수 백배로 성장하면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거만이라는 것이었다. 우선 기업주인 허방진 회장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그의 오른 팔인 천태운 상무는 실세의 지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일부 직원에 대한 비난과 멸시, 그리고 협력업체를 협력하는 업체로 취급하지 않는 무시와 건방짐은 회사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회사 규모에 맞춰 고급인력을 데려온 결과, 임원은 어느덧 16명이 되었고 부장이나 차장급은 3배로 늘어났다. 물론 규모에 맞춰 각지의 인재들을 데려온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을 영입했다는 것도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 잘난 체하는 인간들이 많았다. 그런 탓으로 회의도 수시로 열렸고, 회의를 하기만 하면 서로 싸움을 하면서 균열이 생겼다.  

 

   오제원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충실이라는 이름하에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 서서히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보다 질 좋은 자재를 경제적인 가격으로 구입하여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구매업무의 기본이고, 이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상생의 관점에서 보면 옳지 못한 것이 자꾸만 눈을 거슬리게 하였다. 

   우선 협력업체와의 관계에서 비슷한 품질이라면 가격을 깎고 또 깎아야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 되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 하더라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근거 없이 후려치기만 하면 상대업체가 주저앉거나 거래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이익은 보장해 주어야 한다. 어느 기업이든 판매가가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제품은 접는 것이 원칙이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창출에 있기 때문이다. 공급업체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회사에 최대한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름대로 전공을 살려 자재 원가분석을 하고, 그 자료를 내놓으며 가격협상을 하다 보니 협력업체들과 실랑이를 하는 날이 많아지게 되었다. 

   

   실랑이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매자의 입장에서 갑질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악역을 하는 것이었다. 어쩜 인생이라는 자체가 악역을 잘 해야 윗사람이나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보다 악역을 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從善不如惡(종선불여악)이란 말이 있다. 그저 착하기만 한 것은 악함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천사같은 역할만 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 도움 주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때로는 도움을 강요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때로는 천사의 역할도 하고 때로는 악역도 해야 하는 것이 삶인 것 같다. 

   특히 주변의 경제상황이나 업계상황이 악화되면서 모두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면 더 독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오제원 이사는 잘 되느냐 좀 못되냐의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악역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했다. 이런 악역도 사실 따지고보면 허 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자신의 비굴함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어느 조직사회에서나 실세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인생이란 어차피 비굴을 겪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길이다. 회의 때마다 임원들끼리 싸우는 것도 사실 모두 허방진 회장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술수들이 깔려있다. 다만, 출신과 친소관계에 따라 말의 강도가 달랐을 뿐이다.

   오제원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를 크게 성장시킨 손천식 전무를 높게 평가하여 그를 추켜 세운다면 분명 허 회장의 오른 팔인 천태운 상무의 비난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연히 그 회사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영자로 영입된 신대홍 사장과 가깝게 지낼 입장도 아니기에 오제원은 '불가근불가원'의 원칙을 고수하며 지냈다. 그렇게 눈치나 보면서 지내는 자신의 모습에서 또 비굴함을 보았다.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협력업체들에게 갑질로 보여지는 행동도 어찌 보면 비굴한 모습이다. 그 자체가 허 회장이나 천 상무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은행에 근무할 때 지금 하는 악역의 절반만 했어도 은행에서 아주 높게 승진도 했고, 더 나아가 다른 곳에서 더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내 생에 봄날은"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은행에 입행한 동기들보다 비교적 일찍 지점장이 되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약 10년에 걸쳐 힘들게 보냈던 지점장 시절의 일들이 떠올라 노래 가사가 더 가슴을 후벼 판다. 

 

 

     기막힌 세상 돌아보면

   서러움에 눈물이 나

   비겁하다 욕하지마

 

   저 하늘이 외면하는 그 순간

   내 생에 봄날은 간다

   이 세상 어딜 둘러봐도

   언제나 나는 혼자였고

   시린 고독과 악수하며 

   외길을 걸어왔다 

 

   멋진 남자로 살고 싶어

   안간힘으로 버텼는데

   비참하게 부서졌다

   비겁하다 욕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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