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9

헤스톤 2023. 6. 17. 21:24

 

9. 승진의 그림자(1)

 

   약 30년의 은행생활에서 오제원이라고 욕심이 없었겠는가. 임원도 되고 더 높은 곳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비굴과 거리가 먼 성품은 언제나 걸림돌이 되었다. 그보다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도 남들의 어려운 사정을 앞세우는 자세는 언제나 마이너스로 작용하곤 했다. 그저 착하게 사는 것이 오제원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은행 생활의 마지막 점포에서 허방진 회장을 만나 (주)하나케이시에 입사하게 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오제원은 회사에 이사대우로 입사하여 약 2년 후의 정기인사에서 '대우'자를 떼고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날 무렵 상무로 승진을 하였다.

   은행원 생활을 할 때와 다르게 때로는 착함을 비굴함으로 바꾼 덕택이다. 대개 은행이나 대기업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중소규모나 일반 개인기업에 가서 오래 근무하기가 힘들다. 그만큼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1년이나 그 이상 오래 버틴다는 것은 어느 정도 비굴함을 바탕에 깔았다는 말과 같다. 여하튼 오제원은 조직에 충성하며 비굴의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다만 은행과 전혀 다른 환경의 회사에 입사하여 보낸 짧은 시간들이 몸으로 느끼기엔 매우 긴 시간이었다. 승진은 세월과 건강을 갉아먹었다.

   

   어느 곳의 인사나 마찬가지로 (주)하나케이시의 인사에서도 잡음이 따랐다. 오제원이 입사한 1년 후 회사의 정기인사에서 직원들이 가장 크게 불만을 가졌던 부분은 생산부에서 근무하는 서미순이라는 여직원의 승진이었다.

   서미순은 당초 생산 일용직으로 들어왔었다. 당시에는 주제품인 FLDC(Flexible Light Drive Cable)를 생산하는 MM(Main Machine)을 하루 24시간 풀가동 하여도 주문량을 맞추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연히 전 직원이 연장근무를 하며 3교대를 하던 시절로 모자란 인력은 일용직으로 대체하곤 했었다. 서미순은 그때 들어와서 단순노동을 하던 직원이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다가 들어왔지만, 그녀는 손놀림만 빠른 것이 아니고, 머리회전도 빠른 편이었다. 무엇보다 서미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미모가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이혼 후 혼자 산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껄떡거리는 생산직의 직원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탓으로 자주 입방아에 올랐다. 업무적으로 직접 연관된 생산부서의 담당대리인 김규진 대리와 가깝다는 말이 한참 돌더니 담당 부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는 회사의 최고 실세인 천태운 상무와 가깝게 지낸다는 말이 돌았다. 회사 내에서 둘이 다정하게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영업부서의 어느 직원이 가족들과 속초에 놀러갔을 때, 둘이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소문은 참 빠르다. 거의 전 직원이 아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정기 인사에서 서미순은 정식직원이 된 것은 물론이고 대리로 파격 승진까지 하였다. 당시 대졸 여직원은 수습기간이 지나면 계장이 될 수 있었고, 대리까지는 최소 3년 이상이 걸렸으며, 고졸 여직원의 경우 최소 7년 이상이 지나야 대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 직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눈에 띄는 인사이었다. 단순 일용직으로 들어온 직원을 정식 직원으로 삼은 것만 해도 큰 파격인데, 대리로 발령까지 냈으니 말이다. 다만, 나이상으로는 서미순의 나이가 30 중반이었기 때문에 나이만 놓고 볼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대리로 지내던 서미순에 대한 인사 문제로 시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 해이었다. 서미순이 천태운 상무를 어떻게 조종을 했는지 대리로 발령받은 지 1년 만에 서미순은 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서미순이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서미순에게 제일 껄떡거리다가 몇 번 관계까지 맺은 것으로 알려진 담당 대리이었던 김규진 대리는 이제 직위상으로 역전이 되었다. 서미순이 오히려 이제 그의 직속상관이 된 것이다. 나이는 김 대리가 한 살 어리지만, 김 대리 입장에서 보면 정말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김 대리는 다음 날 술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천태운 상무 방으로 들어갔다.

   "상무님! 정말 이러실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대리가 된 지 이제 4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리 1년밖에 되지 않은 서 대리를 과장으로 승진시킨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인사가 아닌가요?"

   "김 대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긴 하겠지만, 회사에 큰 공헌을 한 직원은 특별승진시킬 수 있다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서미순 과장이 지난번 TD(tape density) 조절장치를 만들어 수작업 직원 수를 획기적으로 줄인 공을 김 대리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 이게 지금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술에 취해 여기에 와서 무슨 불만의 소리를 내뱉는 거야?"

   그러자 김 대리는 상무 명패를 들었다가 탁 내려놓으면서 쏘아붙였다.

   "TD 조절장치요? 그것은 내가 이미 3년 전부터 시도해 본 것으로 아직 상용화하기는 문제점이 많아서 미루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불만의 소리? 만약 상무님이 이런 개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는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이런 싸가지를 봤나? 너는 TD를 시도만 해봤을 뿐이고, 서미순 과장이 단점을 보완하여 실제 운영시켰음을 잘 아는 인간이 어디서 술 먹고 와서 행패야? 너 오늘부로 해고시킬 테니 당장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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