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억 속의 향기

헤스톤 2018. 5. 27. 16:12


어디를 가는지 버스를 타고 있다.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몹시 힘들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부부싸움을 했거나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운좋게 왼쪽에 예쁜 여자가 앉아 있는데, 그녀로부터 좋은

냄새가 난다. 졸고 있는 듯 하더니 그녀가 내 어깨위에 머리를 살며시 올려놓는다. 다른 사람같으면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길게 뻗어서 기댄 머리를 밀어 내겠지만, 지금은 예상하지 못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무엇

보다 냄새가 너무 좋다. 장미꽃 향기 같기도 하고 라벤더 향기 같기도 하다. 버스가 출렁일 때 마다 나의 뺨을 

부드럽게 건드리고 있는 긴 머리칼의 감촉은 가슴을 마구 두근거리게 한다. 우울했던 기분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이제는 짜릿함을 느끼고 있다. 이럴 땐 계속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도 조는 척하며 머리를 그녀 머리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리

고는 긴장이 된다. 그녀가 깨어나서 고개를 바로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가 몸을 좀 가까이 밀착한다. 그녀와의 접촉에 나의 왼팔이 방해가 되는 것 같아 팔을 빼서 그녀의

왼쪽 어깨위로 올려 놓았다. 그냥 이 상태로 지구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아~ 마누라다. 저쪽에서 마누라가 싱긋

웃으며 다가온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조금 더 이 쾌감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쉽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빨리 자세를 바로하고 싶은데 기울어진 내 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어깨위로 올린

팔을 제대로 하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미치겠다. 마누라가 내 머리를 세게 밀어낸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아~ 꿈이었다.

 

꿈속에서 머리를 기대고 향기를 전해 주었던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도 아니고, 꿈을 깬

이후에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얼굴이다. 그렇게 여름날의 하루가 지나갈 무렵 오래 전의 착한 여자가

생각났다. 그녀의 나이나 이름은커녕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긴 머리와 향기가 꿈속의 그녀와 닮은 것 같다. 

 

내 나이 열아홉되던 여름,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에 왔다. 그야말로 촌놈이 말로만 듣던 서울에 도착하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정확히 기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액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시험

하는 모 연구소에 시험을 보러 왔다. 주소만 들고 시험장소를 찾았다. 우선 서울역 앞의 큰 건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었다. 이렇게 큰 건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높이 솟은 건물에 크게 압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이 반쯤은 나갔다. 

아는 것은 주소 하나뿐으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몰랐다. 역에서 왼쪽으로 걸었다. 매캐한 냄새와 더불어

인상이 별로 안 좋은 인간들이 지나간다. 날씨는 우라지게 덥다. 끈적거린다. 염천교를 지나 줄지어 있는

구두 가게들을 바라보는 극장앞 시내버스 정류장에 갔다. 각종 차량들과 사람들로 정신이 없고 더위와 매연

으로 인상이 쪼그라든다. 서울이라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날씨탓인지 대부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중에 얼굴이 착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 왔다. 주소를 들이밀며 몇 번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수수하지만 깨끗한 옷차림으로 무슨 장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었는데, 분위기로 보아 학생이나 직장인은 아닌 것 같았다. 서울에 처음 왔다고 하면서 시험보는 곳을 찾는

것이라며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주소를 한참 보다가 자기가 아니면 이곳을 찾지 못할

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따라 오라고 해서 내가 가야할 곳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가 가야할 곳은 타야할 버스도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버스가 왔는지 타라고 하였다. 버스값도 그녀가 지불하였다.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장바구니에는 꽃도 한 다발 있었지만, 긴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몇 정거장을 지나서 

내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무더운 여름 날씨 탓으로 등에서는 땀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주소를 보며 골목

여기저기를 누볐다. 복덕방에 들어가 길을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묻기도 하였다. 그녀도

지리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졸졸 따라 다녔다. 날도

더운데 이쪽저쪽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지나갔던 길에 다시 오기도 하였다. 그녀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래도 꽃 향기가 났다. 사람에게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헤매다가 

높은 지대에 위치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듯 "시험 잘 보라"는 말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까 지불한 차비

라도 주려고 하였더니 웃으면서 사양한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나이도 모르고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꿈속의 그녀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준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너무 큰 비약일 것이다. 다만, 

머리와 향기가 닮았다. 그녀는 정말 향기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이후 누가 나에게 길을 물으면 향기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매우 친절한 사람이 되곤 하였다.   


* 후반부분은 수 년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곳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그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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