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한 약속
"4년 후 대전역에서 만나자!"
4년 후에 만나기로 하였다. 그 친구와 나는 내기를 하였는데, 그 결과는 4년 후에 나오기 때문이다. 내기
에서 진 사람이 밥도 사고 십만원을 주기로 하였다. 때는 1971년으로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이었기 때문에
십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 돈은 4년 후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등록금보다도 더 큰 금액이었다.
때는 1971년 4월말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난 직후이었다. 내기의 대상은 4년 후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대부분 알겠지만 1971년 대통령 선거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 개헌을 하여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삼선개헌이란 당시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있다'는 조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고 개정한 것으로 박 대통령이 한번
더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개헌한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당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약 634만표를 얻었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약 539만표를 얻었다. 표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나와 내기를 한 학생의 이름은 '김을수'이었다. 이름에 "갑"이 아니고 "을"이 들어가다보니 그 애 명찰을 보는
선생님이나 반 아이들한테 그 애가 자주 듣는 질문은 "형의 이름이 갑수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
애는 맞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정말 형의 이름이 "갑수"냐고 물으니 그 애는 빙그레 웃는다. 그 애는
형도 없고 동생도 없으며 누나들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왜 그렇게 대답하느냐고 물어보니 그 애의 대답은
이러 하였다. "갑수가 아니라고 하면 왜 을수라고 이름을 지었느냐고 하면서 물어보고 또 다른 것을 물어보곤
하여 귀찮아 그냥 짧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애는 "을"이라는 이름을 갖고 더 이상 대화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날 역사시간이었다. 책상 사이를 오가던 선생님이 그 애 명찰을 보고 물어본다.
"너의 형 이름은 갑수인가?" "예!"
"그럼 네 동생의 이름은 혹시 병수인가?" "예!"
영혼없는 그의 짧은 대답 "예"를 듣는 순간 나는 왜 그렇게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내기는 그 친구의 장담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표 차이가 크지 않았던 탓으로 그 친구는 "김대중 씨"가 4년
후에는 분명히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아깝게 패했지만 다음 선거에서는 분명히 이길
것이라고 침을 튀겼다. 나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면서 그런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다. 김대중 씨가 후보로 될 가능성도 적을 뿐더러 설사 그가 후보가 된다고
하여도 여당 후보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당시 여당의 2인자이었던 김종필 씨가 4년 후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와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내기를 하게 되었다. 4년 후 투표결과가
나온 날 저녁에 대전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진 사람은 빚을 내서라도 10만원을 들고 나오기로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꾸라지 둘이 껴안다가 미끄러질 이야기이다.
(중학교 졸업 앨범에 있는 사진임)
당시 우리는 당연히 4년 후에 대통령 선거가 있을 줄 알았다. 왜냐하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3선개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었고, 대통령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었다.
4년 후 여와 야의 후보로 김종필 씨나 김대중 씨가 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선거가 없어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되어있는 것처럼 그로부터 약 1년 6개월이 지난 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여하튼 4년 후의 약속은 지킬래야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말았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니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 해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한달 후인 5월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곳 근처에서도
유세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어느날 대전 신안동의 "고려극장"앞 공터에서 있었던 유세 광경을 구경하였다.
전날 비가 내려 땅이 질퍽거렸다. 민주공화당 후보인 "임호"라는 사람이 목청을 높였다. 그의 연설 중 기억
나는 대목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없이는 살 수 없는 이곳, 우리는 왜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동안 야당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이란 것을
강조했었던 것 같다.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야당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찬조연설하는 사람의 말 중 생각나는
것 하나는 이러하다.
"지금 여기에 왜 이모라는 사람이 와서 떠들어대는 겁니까. 이모나 고모는 자기 집으로 가라고 하십시오.
우리 가족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아마 상대편 후보인 "임호"를 소리나는대로 읽어서 그 사람은 이모이니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었다.
결과는 야당인 신민당 "박병배 후보"가 다시 당선되었다. 그 후에도 그 두사람의 경쟁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유세현장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크면 정치를 하며 폼 좀 잡아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은 살면서 자꾸만 멀어져 갔다. 어찌보면 그 쪽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잘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약속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욕망으로
포장된 자신과의 약속은 내려놓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약속을 지키며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