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넘버 쓰리

헤스톤 2018. 5. 13. 13:55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의미에서 마련한 회식자리이었다. 계속 돌아가면서 건배제의를 하고

원샷을 하는 바람에 1인당 소주 2병 이상 마신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주량이 다르기 때문에 나같은 경우는

사이다로 여러번 건배를 하여 취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이 취했다. 분위기탓인지 취했으면서도 술과

안주를 계속 시키니 음식점은 신났다. 그러는 중에 직원 한 명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헤드테이블로

오더니 횡설수설한다.

"이 사람이 넘버 원이고, 이 사람은 넘버 투, 이 사람은 넘버 쓰리.."

나를 가리키며 "넘버 쓰리"라고 하는데,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니 90년대에 본 영화

"넘버 3"에서 주인공인 삼류 깡패 "태주"의 대사가 생각난다.

"누가 나더러 넘버 쓰리래. 내가 넘버 투야!"

"태주"가 조직내 라이벌인 "재떨이"보다 자기가 더 위에 있다는 것을 표현했던 것 같다. 사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 투나 쓰리는 비슷하다. 넘버 원이 아닌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다. 넘버 원이 싹쓸이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는 그 직원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아무도 귀담아 듣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서열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순서에 민감한 것은 직위나 성적뿐만이 아니다. 일반 대중들은 도긴개긴으로 볼 수 있는 순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수년 전 모 금융그룹의 K 회장이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왜 우리가 아직도

4번이냐. 넘버 2로 불러달라"는 식의 말이었다. 그 금융그룹의 위치를 남들이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사실 일반인들 대부분은 그 은행의 규모가 다른 은행보다 얼마나 큰지 작은지 아무런

관심도 없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은행을 다녔던 사람들에게는 아래의 말이 뇌리에 박혀있다.

"조상제한서"

"조상제한서"는 우리나라 금융계를 대표하는 5대 시중은행이었다. 은행 창립순으로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의 앞 글자만 따서 그렇게 불렀다. 자산규모가 큰 순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중에서

이름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은행은 하나도 없다. 합병 등을 거치며 찬란했던 그 이름들은 모두 역사속

으로 사라졌다. 다만, 제일은행이 영국의 스탠다드 챠타드 은행에 인수되어 이름이 없어졌다가 다시 환원

되어 SC제일은행으로 겨우 이름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즉, 시중은행 코드인 20번대 코드의 21번부터

25번 순서에 있는 "조상제한서"는 "넘버 3"였던 SC제일은행만 23번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 코드에 대하여 가볍게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국책은행은 한자리 숫자로 한국은행이 01, 산업

은행은 02, 기업은행은 03이다. 내가 약 30년동안 다녔던 은행은 국책은행 중에서 "넘버 쓰리"다. 요즘은

은행 코드를 세자리로 부르는데, 이 때는 앞에 0을 더 붙여 001, 002, 003 으로 부른다. 그럼 국민은행은

왜 04일까? 국책은행 시절에 받은 코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름이 사라졌지만 외환은행도 국책은행 시절

받은 코드 05이다. 시중은행은 20번대인데, 앞에서 언급한 "조상제한서"가 21번부터 25번이고, 그 후

80번대도 시중은행이다. 하나은행이 81이고 신한은행은 88이다. 지방은행은 30번대이고, 외국은행은

50번대인데,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코드들이 많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국신우하"로 불렀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은행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최근의 자산

규모나 순이익을 감안한다면 순서를 다르게 불러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들 시중은행들은 현재

리딩뱅크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은행들이다. 

 

어찌보면 세상에 영원한 1등은 없는 것 같다. 학교다닐 때 1등만 하거나 잘 나가던 사람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기억에서 사라진 경우가 많다. 부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개그콘서트에서 유행시킨 말처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2등이나 3등은 물론이고 꼴지가 있기 때문에

1등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닌가.

까짓거, 회사에서 "넘버 3"면 어떤가. 사실 난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따지면 넘버 쓰리는커녕 열손가락

안에도 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폼 한번 잡아보며 "태주(한석규 분)"의 대사를 변형시켜 흉내 내본다.

"이런 제기랄~ 누가 나더러 넘버 쓰리래. 사람 됨됨이로 보면 내가 넘버 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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