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아무나 될 수 있다. 처음부터 시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고, 어느 누구나 살면서 시인이 된다.
다만, 좋은 글을 쓰는 시인인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 시인인지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시인이 되는 사람도 있고, 늙어서 시인이 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죽을 때까지 시(詩)라는 것과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시를 쓰면서 산다.
글로 쓰지 않더라도 삶 자체가 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단, 그 시가 얼마나 울림을 주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시에는 흔히 3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노래와 그림, 그리고 감동을 말한다..
즉, 먼저 운율이 있어야 한다. 음표나 박자가 잘 어우러져 머리에 잘 들어오는 글일수록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기쁜 노래인가, 아니면 슬픈 노래인가는 상관없다. 빠른 노래이건 느린 노래이건 그런
것은 상관없다. 다만, 장단고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풍경화도 상관없고 인물화도 상관없다. 수채화가 될 수도 있고,
유화가 될 수도 있다. 여백을 잘 살려도 좋고, 화려한 물감을 사용해도 좋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가장 중요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자기도
감동하는 글이어야 한다. 자기 자신도 감동 못하는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지만,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나는 시인이 되는 조건으로 몇 가지를 꼽는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된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죽도록 사랑해야 한다.
미치도록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시인이 될 자질이 있다고 본다.
누군가로부터 커다란 고통이나 괴로움을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느낌을 표현하면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밝은 쪽에서만 살아서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고 본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그만큼 깊이가 줄어든다. 전쟁중이거나 식민지 시대에 좋은 시가 많이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한줄기 빛은 더 밝게 보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보이거나 느끼는 모두가 시의 종자이지만 고저가 클수록 좋은 빛깔이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시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언제나 밋밋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시인이 될 수 없다.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사람은 좀 힘들다고 본다. 좋은 글을 쓰기가 어렵다.
평범한 소재는 감동을 주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극과 극의 생활만 시의 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기쁨, 상대적인 고통도 좋은 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에 있어서 때로는 어눌한 표현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거짓이 아닌, 진솔함이 바탕이 될 때 크게
다가올 수 있다. 며칠 전에 겪었던 일이다.
지하철 역 근처에서 어느 조그만 여학생이 다가온다. 까무잡잡한 동남아 여성이다.
무슨 사진 한장을 보여준다. 네팔 지진으로 인한 현장 사진이다. 처참한 피해자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온다. 우선 사진보다도 그 여학생의 표정이 압권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자신은 네팔의 대학생으로 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띄엄띄엄 한국말로 하는데 쏙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번지르르한 말보다 이렇게 어눌한 말이 더 설득력을 가질 때가 많다.
또 말도 그렇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기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5천원짜리를 꺼내다가 마음이
바뀌어 만원짜리 한장을 통에 넣었다. 그리고 말과 표정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어필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잘 쓴 글은 어떤 글일까? 가을 햇살에 벼 익어가는 것 같은 글은 좋은 글일 것이다.
연잎에서 이슬방울 굴러가는 것 같은 글도 좋은 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글뿐만 아니고 시냇물이
나뭇잎에 걸려서 빙빙 맴돌기만 하다가 끝나는 글도 때로는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글과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글이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