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맞게 살았다. 알맞게 살았어. 이제 가기에 적당하다."
아버지는 마치 해탈한 사람같았다. 죽음앞에서 그렇게 초연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잠을 자다가 조용히
돌아가시기를 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평생을 힘들게 살았고, 장남도
아니면서 장남으로 살아온 인생이 너무 고달프기만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을 때라도 편히 갈 수 있는
"죽는 복"이라도 하늘에서 내려주길 원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아버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언제쯤 가냐고 물을 때마다
약한 말씀 하시지 말라고만 하였다. 쓰러지시기 전에는 방향감각을 약간 상실한 상태이었지만, 용변도
스스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말도 또렷하였기에 조금 더 버티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런 말씀 마시라고 하였지만, 삐뚤빼뚤하게 쓰는 글씨들이 나를 무척 울렸다. 사실 아버지도
어느 정도 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침맞게 살았다. 작게 살지도 않았고, 더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이 적당한 때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니 80번째 생일을 지낸 이틀 후 쓰러지셨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약 5일이 지난
후 세상과 이별을 하였다. 쓰러지신 후에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유서는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유서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것이지만,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돌아가신 후 간소한 장례
절차에 대한 것과 앞으로 기 제사를 없애라는 것, 그리고 꼭 통지해줘야할 사람에 관한 것 등이었다.
아버지는 지나온 삶에 대한 것들은 이미 대학노트 3권에 수기로 적거나 "차마 어쩌지 못한 인생"이라는
책을 통하여 알 수 있게 하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약 3년 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였지만, 결국 뇌에도 암이 퍼질 정도로
병이 악화되면서 노환과 겹쳐 결국 세상과의 인연을 놓았다. 우리나이로 여든하나이었다. 아쉽다면 좀
아쉬운 연세이지만, 일반 남자들의 평균수명보다는 높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1년. 얼마 전까지도 계신 것 같은데, 이렇게 시간은 빨리 간다.
적당하다는 것은 어쩌면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인 것이 더 앞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지나친
음주는 몸에 해롭고, 적당한 음주는 건강에 이롭다고 한다. 그러면 '적당한 음주'에서 '적당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 어떤 사람은 소주 1병이 적당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반병이 적당할 수도 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한잔도 버거울 수 있다. 따라서 적당하다는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몇 살까지 살아야 적당한 삶일까?"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고 본다. 건강 수준이나
자산의 차이가 있어 적당한 나이를 말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솔직히 경제적인 활동없이 오래 살게 되면 후손들
에게 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래오래 사세요."
나이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이런 말을 인사로 건네지 않는다.
정말 오래 살기를 바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좋은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염두에 둔 말로 들려서 싫어할 사람도 있다. 그리고 90살이나 100살
넘은 사람보고 오래 살라고 하면 도대체 몇 살까지 살라는 말일까?
이제는 수명이 길어져서 90을 넘긴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늙으면 죽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고, 아무리 건강하다고 자랑해도 늙으면 죽는다. 내가 생각하는 적당한 나이는 친구들과
비슷한 시기에 가는 것이라고 본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
들과 비슷하게 갈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라고 여겨진다. 너무 빨리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너무
오래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주어진 생명을 연장하거나 단축하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
지에 중점을 두고 세상에 왔었다는 고운 흔적 한 자락이라도 남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책 몇 권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놓을 때, 아버지처럼 적당하게 살았다고 말하며 갈 수 있기를 두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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