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헤스톤 2018. 9. 3. 16:31

 


"네가 형순이냐?"

올 초에 어머니와 동생이 산소를 돌보고 있을 때 그 동네에 살고 계시는 B선생님이 동생을 나로 알고 

말하더란다. 동생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 선생님은 다시한번 "네가 형순이냐?"라고 말하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B선생님은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다.

 

B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실력으로도 인정받고 존경도 받던

분이셨다. 우리 학생들은 그분을 좋아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동등하게 대해 주셨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공부를 가르쳤다.

그분이 살던 집은 면소재지 초등학교에서 약 5Km 떨어진 동네로 나의 친척들이 많이 살던 곳이고, 조상들

산소가 있던 곳이다. 당시에는 그 동네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나의 초등학교 동창들도 여러명 있었다.

그분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계시다는 소리는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곳으로 성묘를 갈 때

마다 산소를 돌보기에 정신이 팔려 그분을 찾아뵙지는 못했다. 오랜기간 무심하게 보낸 것에 대한

찜찜함이 마음 한구석을 언제나 차지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얼굴을 내미는 것도 나름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약 1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이었다. 돌아가시기전에 이미 세워 놓은 비석 밑에 화장한 유골을

모시려고 가니 병원 장례식장에서 문상하지 못한 고향의 어른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아버지가 열심히 활동했던 원불교 관계자들이 많이 오셔서 그 종교의 장례 행사에 열중하고 있을

이었다. 그때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그 동네의 어떤 못된 아낙이 큰 소리로 떠드는데, 요지는 자기들

허락없이 동네 길로 유골함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소위 탓세라는 것을 부리는 것인데, 정말 기가 찰 일

이었다. 화장을 했기 때문에 무슨 상여가 지나간 것도 아니고, 성묘하듯이 자동차길을 따라 왔을 뿐으로

더구나 그 동네가 어떤 동네인가? 아버지가 오랫동안 면장을 하면서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동네인데,

그곳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낙은 그 동네로 시집온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면 소재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에게는 고향이고, 친척들도 오래 살은 곳인데 말이다. 우리 가족들은 속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맞대응을 하면 문상객들한테 모양이 더 우스워질 것 같았고, 그보다  당시 종교 행사 관계로 대응

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 상황을 그 동네의 어떤 점잖은 노인 한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를 떠난 이후 이

점잖은 노인 한분이 아버지 비석옆에 와서 한참을 있었다고 한다. 뒷일을 마무리하던 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으로는 그 노인께서 못된 아낙의 행동을 오랫동안 탓하며 자책하고 슬퍼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직감적으로 그 노인이 B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초에 작은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B선생님이 나의 담임을 맡은

기간은 약 2개월에 불과하다. 물론 좁은 시골이라 그 전부터 서로의 집안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으신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로 3월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당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배운 것외에 복습이나 예습은 별로 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나는 초저녁 잠이 많았다. 아마 9시도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B선생님이

우리집에 왔다. 어머니가 한참 꿈나라에 가 있는 나를 급히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선생님의 실망 섞인 목소리가 나의 귀를 때리고 있었다. 이제 겨우 초저녁인데 벌써 자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올 겨울엔 중학교 입학시험도 치뤄야 하는데,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내용

으로 지금 이렇게 일찍 잘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 오기전에 연희(당시 여학생 중 성적이 제일 우수했던 같은 반 동창)집에 들렸는데, 연희는 호롱불

(당시 고향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둠을 밝히려고 주로 쓰던 불)을 켜놓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데, 형순이는 벌써 자고 있으면 되겠어? 안되겠어?"

선생님의 질책에 어머니의 어쩔줄 몰라하던 모습이 선하다. 그 후 내가 대전으로 전학을 간다고 하니

매우 섭섭해 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선생님에 대한 소식은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네가 형순이야?"

이 말을 동생으로부터 듣고 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찾아뵈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을 수 없었다. 벌초를

한 다음 선생님 댁을 찾았다. 시골의 낮에는 빈 집도 많은 탓으로 집을 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마침 밖에 나와 계셨던 사모님을 만날 수 있어서 선생님 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

이다. 약 50년만이다. 큰 절을 올리고 지나간 이야기, 특히 나의 아버지와 관련한 이야기 등을 하였다. 

선생님을 뵙고나니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이 조금은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B선생님 찾아뵙기"가 버킷

리스트에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해결할 수 있음에 감사드렸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예전처럼 대쪽같은

꼿꼿함을 간직하고 계시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하셔서 너무 감사하다. 

다음에 다시한번 들리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올 때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자꾸만 나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선생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다음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다른 담임선생님을 찾아뵐 생각이다.   

 

(내 생일날 처, 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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