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머리말

헤스톤 2018. 10. 16. 11:04

무엇이 잘못됐는지 출판이 늦어지고 있는데, 나도 느긋하다.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제목은 "기울어짐에 대한 단상(斷想)"으로 출판할 책의 머리말을 이곳에 옮겨 놓는다. 

솔직히 다 뜯어 고치고 싶다. 고친다고 해도 별 수 없겠지만, 그냥 마음에 안 든다.

다음엔 더 멋있는 말로 머리말을 장식하리라.

 

 

 

<머리말>

 

 

기울어진 나무를 바라보며

 

   왜 사는가? 정말 나는 왜 사는 것일까? 그냥 태어났으니 산다거나 죽지 못해 산다고 하면 아무 목적없이 사는 꼴이 될 테고, 인류나 국가 발전을 위해 산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소로운 웃음이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를 쓰는 나의 삶을 과소평가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큰 흔적없이 살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싶지가 않다.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삶은 그래도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은 죽는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기존 생명의 죽음은 계속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라는 것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삶이 끝나면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기울어진 나무로 살은 삶도 종점에서는 다른 삶들과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서양속담으로 알려져 있는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뒤집어서 "반짝이지 않는다고 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기울어진 나무 앞에서 오래 서 있곤 했다. 어쩌면 기울어진 나무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탓인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이후로는 반짝이는 것과 더 거리가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내가 쓴 시들은 반짝이는 것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시를 쓰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한마디로 내 맘에 드는 시가 잘 쓰여지질 않는다. 오래전에 쓴 나의 시들을 보면 시(詩)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예전의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멈출 수 없다. 고향에서 시인으로 통했던 아버지와 닮은 아들이라는 운명을 피할 생각도 없다. 이제 나도 어느덧 등단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렇지만 아직 시집을 내기에는 내 맘에 드는 시가 부족하여 이 책은 시와 함께 내가 보고 느낀 주변의 삶을 쓴 일종의 퓨전이다. 부디 이 책이 반짝거리지 못하고 기울어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매월 더 좋은 책을 내기위해 애쓰시는 전형철 발행인님을 비롯한 모던포엠 가족들, 하늘과 땅에서 웃고 있을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 이정순과 아들 박상철, 그리고 나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거나 맺을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8년 가을 하늘이 푸르던 날 

 

   濟南 박형순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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