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심란한 어느 날

헤스톤 2015. 7. 30. 10:07

 

몇 년 전 조그만 주상복합건물을 매입하다 보니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으면 1가구 2주택으로

양도소득세를 물어야 할 것 같아 부득이 팔기로 하였다. 솔직히 오랫동안 살은 이 집에 얼만큼 정이 들어

미적거리다가 시간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이사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따로 나가 살은지 오래되어 집사람과 둘이 살기는 조금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매매계약을 덜컥 하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팔고 보니 들어가서 살 집이 마땅치 않아 새로 살 집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다.

솔직히 구하러 다녔다기 보다는 집사람 혼자 다닌 것이고 집사람이 본선(?)에 올린 두 집만 나는 구경을 하고 

와서 선택한 것인데, 자꾸만 선택하지 않은 집이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매번 그런 것 같다. 

살아오면서 가지 않은 곳을 자꾸만 바라 보곤 하였던 기억이 난다. 선택하지 않은 그 집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전망이 아주 좋다.

한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멀리 검단산과 예봉산도 보이고 팔당대교도

보인다.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부동산 중개인은 내 표정을 관찰

하면서 입에 침을 묻힌다. 이 보다 더 높은 층이 있지만 그곳에서는 앞에 있는 산 넘어의 지저분한 것까지 

보이기에 이 아파트에서는 이곳을 최고로 친다면서 결정을 종용한다. 

한마디로 별장같은 곳이었고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선택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나에겐 처음부터 선택권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너무 신속(?)하게 처리하는 집사람은 이미 다른 집을 계약한 다음에 나한테 그 집을 맛보기로 보여준 것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이미 계약한 집도 전망은 괜찮은 편이지만 전망 하나만 놓고 본다면

선택하지 않은 집이 훨씬 낫다.

 

 

이럴 때는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싸울 수도 없다. 또 싸워봐야 내가 진다. 

40대까지는 부부싸움에서 승률이 5할은 되었던 것 같은데 50대를 넘기면서 부터는 이겨본 적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집사람 의견을 존중하며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을 통하여 알았기에 그냥

잘 선택했다고 해 줄 수밖에 없다. 어차피 되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속이라도 편하다. 그냥 일부러 밝은 인상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나 스스로를 위로한다.

집사람은 내가 조용한 곳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낼 수 있도록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선택했다고 하는데.. 어쩜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망만 좋다고 좋은 생활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경제도

생각해야지..그래! 맞아! 경제가 우선이지! 이상보다는 현실이야!" "내가 가진 것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목에

힘을 줄 수도 있었을텐데" 하면서도 하루종일 머릿속에서는 전망좋은 집에서 바라 본 경치가 어른거린다.

 

 

'조용필'씨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들린다. 지금 그 노래가 나를 적시고 있다.

"먹이를 찾아 산 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다니는

산 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로 시작되는 노래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왜 산 꼭대기로 올라갔을까.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일품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경치가 경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꼭대기에는 그곳까지 올라가서 먹잇감이 될 만한 동물들이 없다.

함께 어울려야 한다. 경치만 좋아서는 안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를 위로하려 해도 자꾸만 경치가 왜 어른거리는지 모르겠다. 남자의 자존심을 이렇게

뭉개뜨리며 보내는 것이 맞는지 속에서 불이 났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한다. 같은 노래의 가사가 나를 또

때린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솔직히

나도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다. 설사 아무런 실속이 없다고 해도 어떤 분야의 정상에 서 보고도 싶고

남들이 말하는 출세도 해 보고 싶다. 그런데 이놈의 팔자는 전망좋은 집에서 살 팔자도 못되는 가 보다. 

 

 

그래서 심호흡을 하며 또 나를 달래본다.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형이상학보다도 형이하학이

더 중요하다. 톡 까놓고 말해서 물질적인 것이 밑받침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나의

자존심도 좋고 불타는 영혼도 좋지만 더불어 살아야 한다. 특히 가족이나 배우자를 깊이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어쩜 사랑은 외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거야.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라는 가사로 나를

또 달래본다. 

오늘 나는 매우 심란하고 외롭지만 내일은 또 괜찮아질 것이다. 심적으로 최소한 오늘보다는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오늘 하루에 일어났던 심란한 모든 것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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