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때 나는 달빛이 방안으로 살금살금 쌓이거나 화분에서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릴 때 몸이 후끈 달아오르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아내는 이런 시적(詩的)인 것엔 아무 감흥이 없고 "돈 세는 소리에 성욕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상을 꿈꾸던 남자와 현실적인 여자의 차이인지 아니면 살아온 문화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당시 가장으로써
나는 '돈 세는 소리'를 들으면 고단한 삶들이 보일 뿐이었는데 아내는 남편의 월급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사람마다 같은 소리를 듣고도 느끼는 것이 다르다. 화법도 간접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표현방법이 누구에게 통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는 부부싸움후에 이러저러
하니까 풀어지더라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다른 부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마찬
가지로 프로포즈를 어떻게 했더니 상대가 크게 감동하였다는 각종 사례들이 많지만 모두에게 똑같은 방법이
통하는 것도 아니다.
총각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며 내가 눈여겨 보고 있던 여직원에게 어느 날 분위기를 잡고
말하였다. "나는 나의 이상(理想)의 밭을 너와 함께 갈고 싶어!"
어디서 줏어들은 말은 있어 가지고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인데, 그녀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혼자나 열심히 갈라는 식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한 의사표현이 필요할 것 같아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든다. 너하고 같이 있으면 좋다. 너의 생각을 답변
하여 주기 바란다. 만약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3일의 여유를 주겠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관심없다. 그리고 그런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한마디로 퇴짜를 맞은 것이다. 사실 남자의 본능이 꿈틀거려 당시 '어떻게 한번 해볼까'라는 나의 불순한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이런 것을 상대가 읽은 것 같다. 사실 위와 같이 직설적으로 말하게 된 이유는 직장 선배의
성공담에 따른 것이었다.
그 선배의 성공 사례를 거의 그대로 베꼈음에도 나는 실패했다. 그 선배의 성공담은 이런 것이었다.
은행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 선배는 외환업무를 담당하면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직원과 자연
스럽게 업무관련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지냈는데 언제부터인지 여자로
보이더니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로 뿅 갔다는 것이다. 그 뒤로 자신의
속마음을 언제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하면서 보내던 중 사무실에 그 여직원 혼자 있을 때 말했다고 한다.
"허주임님! 나는 허주임이 마음에 듭니다. 허주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허주임을 진작
부터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주임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갑자기 이런 말을 듣게 되어 당황스럽습니다."
"만약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3일내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사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이주임이라는 선배는 이렇게 작업(?)을 걸었다고 한다. 본인의 말 대로라면 이성과 접촉을 하지 않고 살아
오다가 직장에 들어온 이후 자신을 부드럽게 대해주는 여직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도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는데
그 여직원이 곱게 접은 색종이 쪽지를 책상에 던지고 가더란다.
색종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보니까 아~ 글쎄 "OK"라고 크게 적혀 있더란다.
그 때의 가슴벅참을 그가 표현할 때는 나도 전율이 일었다. 그날 밤 분위기 있는 곳으로 가서 미래를 그렸다고
할 때는 더 전율이 일었다. 역사는 예상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보다 예상하고 있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다.
3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답장이 온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성공하여 당초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이거나 직설적인 표현으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것일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단 분명한 것은 상황에 따라 은유적인 표현보다 직접화법이 더 강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노골적
인 표현은 시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지만 알듯말듯한 표현보다는 상대에게 더 매력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시(詩)라는 것도 내 기준으로 볼 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거나 애매한 말로 쓰여진 시보다는 쉬운 표현으로
삶의 이야기나 깊은 내용이 있으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시가 좋다.
그러면 당시 나를 거절하였던 그 여직원은 지금 무엇을 할까.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팍팍 내지르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사실 퇴짜를 한번 맞았다고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을 하면 남자가 아니다.
그 후 더 노골적으로 마음을 전달하여 결국 나는 그 여직원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가 되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