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말 변했을까

헤스톤 2015. 5. 18. 14:16

 

며칠 전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음식점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누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모 지방신문의 귀퉁이에 시선이 꽂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건전한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사람인데 신문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기사내용은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돈지랄한 냄새가 팍 풍기는 것 같아 괜히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과연 변했을까? 

 

 

그 사람은 오래전 모 공단에 공장 건물을 신축하면서 정책자금을 대출받았던 업체의 사장으로 대화를 나눌 때

보면 머릿속에는 온통 돈과 여자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싼 이자의 대출 하나만 딸랑 받고서는 아무 거래도

없었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나는 수신, 방카, 외환을 비롯하여 종업원 급여이체 등 각종 부수거래를 유치하고자

그 업체를 수시로 방문하면서 각종 금융관련 정보나 사은품을 주기도 하고 공장 건물 준공식때는 조금 두둑한 

봉투를 돼지 입에 꽂아주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돈 좀 되는 거래는 모두 다른 은행만 거래하니 나로써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거래유무를 떠나서 사회공헌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남성본능에 충실하기만 할 뿐이었던 

가 어느 날 헐레벌떡 찾아왔다.

"지점장님! 돈 좀 빌려주세요."

"용도는 무엇이고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용도는 알 것 없고 오십만원이 필요하니 빨리 주세요."

"예? 오십~만원이라고요. 오억원이나 오천만원도 아니고 오십~만원."

"지점장님이 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신청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당장 부쳐줄 데가 있어서 그러니 빨리

주세요." 완전히 막무가내다. 마치 맡겨 놓은 돈을 돌려달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간 100억대 매출을 하는 업체 사장이 반년넘게 한번도 오지 않던

은행에 오십만원을 빌리러 오다니. 그것도 일반적인 거래를 하고 있는 은행도 아닌 정책대출 하나 딸랑 있는

은행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그의 사고방식 자체가 괘씸하고 그동안 그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아무 성과도 못

내고 있는 이 마당에 나한테 오기만 하면 무슨 대출을 즉시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

몇 십년동안 은행생활하면서 오십만원의 대출신청을 받기도 처음이다. 그리고 대출이란 지점장한테 그냥 말만

한다고 금방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용도를 비롯한 기본사항 검토외에 대출실행에 필요한 각종 구비서류도 갖춰

되는 것인데 "네가 예전에 돈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고 하지 않았냐"며  지금 당장 내 놓으라는 식이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들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짜증이 났다. 나름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말하였다. 

"아~니 사장님은 통장에 오십만원도 없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모 은행에 예금도 상당히 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거래하시는 은행의 예금통장에서 돈을 인출하여 송금하면 되지 않습니까?"

"입금해줘야 하는 계좌가 이 은행이라서요."

정말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은행의 계좌로 송금을 하려면 같은 은행의 돈으로만 송금이 가능한 것처럼

말한다. 이 은행에는 예금이 한푼도 없고 그렇다고 주머니에 그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으니 막무가내로 대출을

해 달라고 한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다.

 

 

처리방법을 알려주어 일이 처리된 후 누구에게 송금하는 것인데 그렇게 급하게 서둘렀는지 물었더니 역시 예상

대로 그런 것이었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무용담(?)을 한참 늘어놓는다. 그리고 최근에 또 다른 여자를 만나

게 되면서 관리하기 힘들어 그 여자하고는 그만 헤어지자고 하였단다.

"아~ 글쎄  작년에 그 여자가 잠바 하나를 나한테 주었었지요. 그래서 내가 그동안 봉사(?)한 댓가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헤어지자고 하였더니 잠바값을 내 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냐고 하니 오십만원이라고

하더군요. 오늘 당장 입금 하지 않으면 회사로 찾아 온다고 해서 급하게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불러준 계좌번호가

이 은행 것이더군요. 이 은행 하면 지점장님이 퍼뜩 떠오르기에 지점장님한테 달려 온 것입니다."

정말 허탈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떳떳하지 못한 것을 처리하려다 보니 아무 생각없이 행동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신문 한 귀퉁이에서 다양한 봉사활동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웃고 있다. 기사를 보면서

뭔가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나의 감각이 맞지 않기를 빌어 본다. 그를 안본지 긴 시간이 흘렀

으니 실제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 변했을까. 정말 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나는 그동안 얼마나 선행을 베풀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본다. 변해야 한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멋있게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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