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시송개상(視松開想)

헤스톤 2021. 10. 16. 13:26

 

 

 

獨立門(독립문) 현판의 글씨가 매국노 이완용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의 글씨라면 당장 교체가 마땅하겠지만,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동농 김가진(金嘉鎭) 선생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는 등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완용이 書藝(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이름이 높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행서와 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글씨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글씨라고 하는 것은 잘 썼다고 무조건 좋은 글씨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글쓴이의 인품이나 평판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 글씨를 쓴 사람 자체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으로 수집가들도 이완용의 글씨에 높은 가격을 매기지 않는다. 물론 그가 워낙 유명한 명필이었기 때문에 휴지값보다는 높게 쳐주겠지만 말이다.

 

반면 김구 선생이나 애국지사 안중근의 글씨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보면 맑고 기품이 있으며 곧은 성품이 묻어 있다. 젊은 나이에 쓴 글씨임에도 글씨마다 그의 기개와 애국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상황과 겹쳐 그의 유묵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왼쪽에 있는 먹물이 작품용으로 고매원 먹물이고, 오른쪽은 연습용 먹물임)

사실 붓을 손에 들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다른 말로 墨香(묵향)에 젖어 있으면 즐겁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書藝(서예)를 할 때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가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먹물을 사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먹물도 종류가 다양하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다 그렇듯이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만들어진 먹물 사용을 경시하는 이도 있다. 차분히 먹을 갈면서 정신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먹을 갈다보면 힘도 들고, 주변이 쉽게 지저분해지는 탓으로 먹 가는 기계를 사용하여 먹물을 만들기도 한다.   

 

(먹가는 기계로 위 사진 모습에서 연륜을 자랑하고 있음)

 

기계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먹을 갈 때 나는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상품화된 먹물과 먹은 주원료부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파는 먹물은 카본과 PVA라는 합성수지가 주원료이지만, 먹의 주원료는 이와 다르다. 紙(지), 筆(필), 墨(묵), 硯(연)이라는 文房四友(문방사우)가 다 그렇듯이 먹도 종류가 다양하다. 원료에 따라 식물의 씨앗을 재료로 만든 유연묵, 소나무의 그을음을 받아 만든 송연묵, 그리고 혼합묵 등으로 나누고, 제작 대상과 용도에 따라 일반용, 진상용, 장식용, 선물용 등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먹의 원료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松煙墨(송연묵) 제조과정을 보게 되었다. 소나무를 태워서 나온 그을음에 아교와 향료 등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재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먹이 나오겠지만, 그 과정을 보며 주원료가 되는 소나무라는 나무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지고 있는 먹으로 왼쪽은 연습용이고, 오른쪽 운학은 작품용이다.)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드는 날, 산에 올라 소나무의 푸르름을 보았다. 찬바람도 소나무의 절개를 감싸안는 것처럼 보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視松開想(시송개상)이라는 제목으로 漢詩(한시) 한수를 읊었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열리는 생각이라는 의미이다.

 

視松開想(시송개상)

 

寒風松色抱(한풍송색포) 

雲留不促道(운류불촉도)

辛苦過事基(신고과사기)

難中得耆悟(난중득기오)

 

차가운 바람이 소나무 색을 감싸 안으니

구름도 멈춰서 길을 재촉하지 않는다

힘들게 고생했던 지난 일들을 바탕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깨우치며 늙어가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詩(시)가 완성되는 즉시 붓을 들고 自作詩(자작시)를 해서체와 예서체로 써 보았다.

 

 

소나무는 겨울에 춥다고 푸른 잎을 떨구지 않는다. 寒風(한풍)이라고 나라를 팔아먹지 않는다. 소나무의 모습에서 변함없는 신뢰, 당당함과 의연함을 배운다. 찬 바람이 분다고 쪼그라들지 않는 모습을 읽는다. 

안중근 의사가 쓴 유묵으로 널리 알려진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이라는 글귀가 있다. 논어에서 인용한 문구로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이 말을 패러디하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一日不秉筆 手中生荊棘(일일불병필 수중생형극) :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며) 하루라도 붓을 잡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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