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잠 못 이루는 밤

헤스톤 2021. 6. 7. 06:23

 

꿈속을 헤매는 중에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깊은 잠과 얕은 잠을 반복하다가 잠을 깼다. 도대체 얼마나 잤는지 분간도 되지 않으며, 내 몸이 침대에 있다는 것만 알아차릴 정도이었다. 절반만 깬 상태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내 나이보다 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올렸다. 시계의 시침은 2자를 가리키고 있다. 

 

"아니, 이 밤중에 뭐 하는 거야?"

"깼어? 미안해요~ 저혈당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마누라가 새벽 2시에 고기를 먹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마누라가 당뇨로 고생을 한지는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고, 이제는 무엇으로도 조절이 되지 않는다. 한때는 약이나 인슐린 주사로 조절이 가능했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혈당 수치가 춤을 춘다. 혈당 체크기도 많이 발달한 탓으로 팔에 부착해놓은 연속 당 측정 체크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당뇨 수치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몸이 좀 이상하다 싶으면 마누라는 수시로 체크한다. 고혈당과 저혈당의 편차가 엄청 크다. 고혈당보다 저혈당이 되면 마누라는 축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이 시각에 냄새를 풍기며 고기를 먹어야 되나?"

"당신이 며칠 전에 사놓은 비스킷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또 마땅히 먹을만한 것도 없고, 그래서 고기를 구웠어~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비스킷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식탁에 오래 방치되어 있기에 억지로 꾸역꾸역 다 먹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겨놓는 것인데,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에 없앤다고 다 먹어버린 것이 후회된다.

"아니, 지난번에 사놓은 초콜릿도 있고, 사탕도 있지 않았어?"

"남아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다 떨어졌네. 무엇보다 식탁에 비스킷이 계속 보여서 떨어져도 별 걱정을 안 했거든."

자꾸만 내가 바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걸 다 먹어서 마누라로 하여금 새벽 2시에 고기를 굽게 한단 말인가. 마땅히 먹을 만한 것이 없어서 고기를 구웠을 마누라가 측은해진다. 욕심 중에 정말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바보 중의 바보이다. 한밤중에 잠을 깨운 마누라가 밉다는 것에 앞서 어제저녁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저녁밥을 먹은 후 꾸역꾸역 비스킷을 다 먹은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자는 3류이다. 적어도 음식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배가 부르다 싶으면 숟가락을 집어던져라"는 말은 어린 시절에만 유효한 말이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후회되는 일이 부지기수로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먹는 것과 관련된 후회는 후회 중에서도 밑바닥에 해당된다고 본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부모님은 시골에 있었고, 누나가 나의 고교 입시 준비를 도와준다고 대전에 와서 함께 생활을 할 때였다. 누나는 평소에도 음식 남기는 것을 싫어했다. 먹고 남을 만큼 밥을 한 적이 없다. 그런 탓으로 부모님은 손이 작은 누나를 탓하기도 하였다. 누나로 하여금 동생들이 충분히 먹지 못함을 염려했던 것이다.

 

여하튼 입시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그런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밤늦게 돌아오니 저녁밥으로 누나가 김치볶음밥을 했다. 오래간만에 맛있게 먹었다. 누나는 무슨 할 일이 많은지 계속 부엌에서 있었다. 시간상으로 당연히 누나는 식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먹다가 보니 좀 양이 많은 듯하였다. 배가 좀 부르다 싶을 때 남은 양을 보니 몇 숟가락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좀 무리를 해서 꾸역꾸역 다 먹었다.

누나가 방에 들어오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양재기에 담겨 있는 볶음밥이 한 톨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동공이 확장된 그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걸 다 먹었어?"

"응, 조금 많은 듯 하긴 했는데, 한 숟갈 남겨봐야 그럴 것 같아 깨끗하게 먹어버렸어."

"난,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니, 그러면 누나는 아직 저녁을 안 먹었어?"

"네가 오면 같이 먹으려고 네가 올 때까지 기다렸지."

그 늦은 시간까지 누나는 밥을 안 먹고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 뒤 밀려오는 후회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지금 생각으론 다시 밥을 해서 먹으면 되는 것인데. 그럴 누나가 아니었다. 그날 누나는 저녁을 굶었다. 저녁을 굶고 바느질하는 누나를 보며 불룩해진 나의 배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요즘 나는 예전보다 식사량이 줄었다. 이순의 나이가 되기 전에는 마누라가 퍼주는 밥 한 공기를 다 먹고 다시 반 공기쯤 더 퍼서 먹곤 했는데, 이젠 한 공기를 먹기가 힘들다. 어느 때는 밥이 남는다. 대개 한두 숟갈 남겨놓고 숟가락을 놓고 싶어 진다. 그래도 설거지를 생각해서 다 먹곤 하였었는데, 최근엔 그렇지 못하다. 한 숟갈이 남더라도 그냥 남겨야 한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에는 왜 욕심을 냈는지 모른다.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멀리 달아난 잠은 돌아오지 않는다.  뒤척거리다 보니 해 뜨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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