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돈이 뭐길래

헤스톤 2020. 3. 30. 20:26


한시(漢詩) 모음집을 보면 德(덕)과 관련된 시(詩)는 참 많다. 그 중에서 "덕이 재물을 이기면 군자가 되고,

재물이 덕을 이기면 소인이 된다"는 글로 "德勝財(덕승재)면 爲君子(위군자)요, 財勝德(재승덕)은

爲小人(위소인)이라"는 글자를 쓰려고 벼루에 먹을 갈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 모르는 번호이다. 그런데 그 번호가 눈에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선 나의 번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벌써 20년쯤 된 것 같다. 나의 직장이었던 IBK 기업은행에서 일선 지점장들에게 핸드폰을 일괄적으로
지급했는데, 그 때 부여했던 일련번호이다. 나의 핸드폰 번호와는 뒤의 두자리만 다르다. 그냥 끊기가 그런
것 같아 받았다.   
"박 지점장! 어~ 나 J인데, 잘 지냈어?"
자신을 J라고 하는데, 솔직히 긴가민가하다. 물론 J라는 사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고, 함께 근무할 때도 그리 가깝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보다 3살 정도
위이고, 사회 초년병이었던 행원시절 같은 지점에서 근무했다는 인연밖에 없다. 그 후 내가 본부에서
근무할 때 옆 부서에서 잠시 그가 근무하였으며, 그때 그와 말을 섞었다고 해도 20년 이상이 흘렀다. 20년
이상 아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왜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오랜 기억을 더듬으니 목소리는 맞는 것
같은데,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박 지점장! 내가 급해서 그러는데, 나에게 2백만원만 빌려 줄 수 없을까?"
당장 그 돈이 없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서두른다. 다급한 목소리로 숨 넘어간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20년 이상 아무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잠시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그가 급하다고 해도 누구에게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으로
지금 처리하지 못함을 둘러댔다.
"아~ 제가 지금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인데, 나중에 통화하면 안될까요?"
"아~ 지금 당장 급해서 그래. 내 집사람이 어디 가서 그러는데, 집사람이 돌아오는대로 금방 갚을테니까, 
지금 2백만원만 송금해주기 바래."
그 집의 자금관리 사정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뱅킹 등으로 송금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집사람 핑계를 대는 것도 이상하다. 다시한번 나는 지금 누구와 중요한 미팅 중에 있음을
말하며 나중에 통화하자고 했다.
"어~ 그래. 그럼 안되겠네. 나중에는 필요없고, 내가 지금 당장 급해서 전화했어. 미안해. 미안해."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괜히 찜찜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학교 후배이면서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나의 입행동기인 K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을 꺼내기가 바쁘게 그는 나의 말을 끊고 대뜸 돈부터 주었느냐고 묻는다. 주지 않았다고 하니
다행이라면서 그가 설명해주는 내용은 J라는 사람이 오래 전부터 도박을 한 것 같은데,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모양이라고 한다. K가 해주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오랜 시간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어떤 급박한 상황에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돈을 부탁하는 그의 비굴한 모습이 보이며 돈이
곧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J라는 사람과의 통화로 심란해진 마음은 오래전 W지점장 재직시절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껄끄러운 기억이다.
어느 날 계절과 맞지 않게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건들거리며 학교 후배라고 하면서 나타났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이다. 내가 잘 아는 Y후배와 동창이라면서 왔기에 Y로부터 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출 상담을 하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Y에
대한 말과 안 좋은 곳에 갔다 온 이야기만 늘어놓더니 돈 좀 꿔달라는 것이었다. 대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용도는 리어카 구입비용이란다. 이제부터라도 나쁜 일 하지 않고,
행상이라도 하면서 열심히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너무 어이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후배라고 하면서 나타나 돈을 요구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
했다. 돈을 주면 강도당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불쾌해질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계속 이런 식
으로 여기저기 구걸하러 다니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그냥 보낼 수 없어 당시 지점 소품이었던 비누 세트를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비누 세트의
포장지를 그 자리에서 뜯더니 비누들을 응접실에 확 뿌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결정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 사건은 오랜시간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실 당시 그에
대해서 알아보고 훗날 결정하겠다는 어떤 암시를 주었지만, 그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돈이란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생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돈의 위력은 크다. 정말

돈이 곧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돈 때문에 사람이 망가져서는 안된다. 만약 나같은 경우 아무리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 온다해도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굶어죽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20년 이상 아무 연락이 없거나,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돈을 요구한 그들

생각에 "德勝財(덕승재)면 爲君子(위군자)"라는 글씨를 쓰면서 우울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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