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일수회

헤스톤 2020. 2. 6. 10:16



"참석통보한 인원 모두 참석하였으므로 건배를 하겠으니 앞에 있는 잔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매월 첫째 수요일에 모임은 시작된다. 모임 명칭은 매월 첫째주 수요일에 모인다고 하여 "일수회"

이다. 명칭은 매월 3번째 금요일에 모임을 갖는 "삼금회"나 매월 4번째 목요일에 만나는 "사목회"처럼 그런

식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처음 시작은 입행 동기들끼리 서로 근황이라도 알고 지내자는 취지에서 모였다. 즉, 본점이 있는 을지로

근처에서 근무하는 동기들끼리 점심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자는 의미에서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제 20년 이상의 많은 시간이 흘렀다.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동기들이 은행을 퇴직하면서 모이는 인원도 늘었고, 더 끈끈해졌다는 것이다. 회원

들 모두 같은 날 입행했기 때문에 비슷한 나이로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당시 군대에 갔다온

후 입행한 동기들과 아직 군 미필인 상태에서 입행한 동기들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또, 학교다닐 때 재수나

삼수 등을 한 친구들도 있기 때문에 나이 차가 많게는 6살이 나기도 한다. 

따라서 태어난 해와 달에 따라 퇴직 일자는 천차만별이다. 입행후 강산이 세번 정도 바뀌게 된 약 11년 전

부터 퇴직하는 동기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젠 현역으로 근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제는

을지로 근처와 아무 연고가 없어도 입행 동기라면 가입 제한을 두고 있지도 않다. 음식점만 을지로 근처의

식당을 이용할 뿐이다. 물론 입행동기 모두가 일수회 멤버는 아니고, 중요한 것은 한달에 한번 이상 서로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동기들끼리 어울린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갖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만난

다는 그 자체가 좋아서 한달에 한번씩 그렇게 보고싶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수회"에 대하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내가 참여하고 있는 모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선 모임의 회장은 참석 인원 파악 등을 위해 약 10일 전쯤 밴드에 모임 공지를 하는데, 이때 정말 놀라운

반응이 나온다. 공지한 후 3시간도 되지 않아 총원의 약 50%가 참석이나 불참석을 통보하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약 80%가 참석여부를 알려준다. 이렇게 반응이 빠른 모임은 드물 것이다. 공지 후 삼일 정도

가 되면 참석자 명단이 확정된다.


내가 오랫동안 회장을 맡고 있는 시골 초등학교 동창의 서울 모임과는 너무 많이 대비된다. 물론 초등 동창

모임도 나름대로 장점이 많지만, 회의를 끌고 가는 입장에서 큰 차이가 있다.  

안타깝게도 초등 동창 모임은 공지를 하면 회원들의 메아리가 거의 없다. 참석여부를 통보해달라고 독촉

해도 미지근하다. 그리고 웃기는 것은 통보가 없다고 해서 모임에 참석할 인원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론 회원 모두가 참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임 당일엔 꾸역꾸역 모여들어 최소 2/3는

모임에 와서 가가대소한다.

한편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그것이 우리 세대의 고향 색깔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것과 관계없이

동창들끼리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매우 높기 때문에 다른 불편은 그냥 묻혀버리곤 한다.




여하튼 "일수회"는 내가 참여하는 모임중 반응이 제일 빠른 모임이다. 당일까지도 참석인원수를 확정하지

못하는 모임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참으로 특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매월 참석인원은 16~25명

정도이다. 물론 이후 여러 사정 등으로 1~2명의 변동이 발생하지만, 거의 변동이 없다.

그리고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사람들은 당일 약 30분 전부터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 5분 전이 되면

거의 전원이 참석한다. 간혹 1~2명 정도가 안 온 경우가 있는데, 이들도 최소 정시까지는 모두 도착한다.

군대에서 식사시간을 지키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 일반 친목모임으로 전원이 이렇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모임은 드물 것이다. 따라서 정시 5분 전이나 최소 정시에 회장은 "모임시작을 알리는 건배제의"를

한다.


"참석통보한 인원 모두 참석하였으므로 건배를 하겠습니다."

정말 독특하다. 회원들은 참석여부를 빠르게 통보하고, 참석을 통보한 사람은 모두 정시 이전에 온다.

모임에 참석한 회원들은 입담좋은 몇 사람에 의해 식사시간이 즐겁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쯤부터 동기

들과 관련된 공지사항이나 지난 한달동안에 특별한 일을 겪은 사람의 발표 등이 이루어진다. 알고있는

상식이나 건강 정보내용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모임 이후에도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은 탓으로 

부분 가까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2차 모임을 갖는다. 그러다가 헤어지기가 아쉬운 동기들은 3차로

당구장에 가곤 한다.

모임 자체가 단순한 듯 하면서 구성원들간에 끈끈한 기류가 흐른다. 

그리고 참석한 동기들의 언행을 보면 간혹 웃음이 나온다. 어쩜 그렇게 안 변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눈에

띄게 줄어든 머리숱이나 늘어난 주름 등이 예전 모습은 아니지만, 대부분 말투나 행동이 옛날과 변함

없다. 정말 표정이나 걷는 모습에서도 변화를 감지할 수 없으며, 성품이라는 것도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약간의 변화라고 하면 퇴직 후 각자 추구하는 바에 따라 글이나 그림, 사진이나 여행 등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고 있다는 정도이다. 은행원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명예롭게 퇴직한 탓인지 대부분

현재의 상황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으며, 아직도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이렇게

깊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인연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은행 재직시에는 몰랐던 재능을 비춰주기도 한다. 역사나 문화, 혹은

그림이나 음악에 깊은 지식을 보여주는 동기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는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다. 모임에

참석하는 얼굴들을 떠올리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을 보면 서글퍼진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기도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 이상으로 서로 웃음을 주며 인연을 유지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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