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애인을 구합니까

헤스톤 2019. 6. 10. 12:57


어린 시절 동네 할아버지한테 들었던 소화(笑話)가 생각난다.

서방님이 아파서 드러누웠을 때, 조강지처가 달인 한약의 양은 들쭉날쭉한데, 첩이 달인 것은 언제나 그

양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조강지처는 그저 남편이 낫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 약을 달여진 대로 내오는

반면에, 첩은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남으면 버리고 모자라면 물을 타서 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첩은

정성껏 약을 잘 달였다고 칭찬을 받는 반면에 조강지처는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약 10여년 전의 일이다. IBK 은행의 지점장이었던 나는 G기업의 대표이사인 H와 건물 매입과 관련된

면담을 하면서 위의 이야기가 생각나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H사장님은 지금 조강지처를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애인을 구하는 것입니까?"

"무슨 말씀이신가요?"

"조강지처를 원한다면 A를 선택하시고, 애인을 원한다면 B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H대표이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IBK 기업은행의 S지점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그냥 그랬다. 내가 S지점으로 부임한 첫날 이업종교류회의 회원들 몇 명이 인사차 내점

하였을 때 단체로 온 그를 보았는데, 회원들 중 그가 제일 로(low) 핸디로 컴퓨터 샷을 구사한다는 것

이었다. 그는 골프채널 TV에 나오는 출신학교 대항의 대표로도 나갈 정도로 탁월한 실력의 소유자이었다. 

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골프를 너무 잘 친다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싱글이하의

수준을 유지하려면 자주 필드에 나가야 될 것이고, 그렇게 하다보면 사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조금은 경계를 했는데, 지나면서 보니 그는 인성도 좋고 경영능력도 뛰어난

CEO이었다. 자기관리에도 철저하였고, 여러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업을 늘려 나갔다.


그 업체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면서 그렇게 수 개월이 지난 후 그는 건물을 하나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 있는 사무실은 당시 약 12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근무하기에 너무 비좁아 차라리 단독 건물 

하나를 사고 싶다면서 부실채권 관리회사로 넘어가 있는 A빌딩의 등기부등본을 내밀며 조언을 구한다.

조언도 조언이지만 실제 중요한 것은 대출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대출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 회사의 매출규모나 직원 수 등과 비교할 때 사려고 하는 건물의 규모가 너무 컸다. 하지만 그는

건물의 일부 층만 그 회사가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대를 주어 매월 들어오는 임대료로 대출이자를 낼 수

있다며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하였다.


은행 지점장 생활을 오래 하면서 다양한 대출들을 많이 취급하였고, 상당히 큰 금액도 대출 취급을 해

보았지만, 단건으로 이보다 더 큰 금액을 대출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지점의 성적

향상을 위해 대출실적이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심사파트와 연락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려고 약간은 업체를 높게 평가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상담을 진행하는 중에 그 회사의 실무 직원들은 A빌딩보다 회사 근처에 매물로 나온 B건물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B빌딩을 그 회사가 산다면 여러가지로 실적에 더 보탬이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B빌딩을 담보로 하고 있는 업체의 여신이 연체중으로 연체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여러가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행의 입장에서 일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G기업의 입장에서도 바라보고 조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B는 겉으로 보아서는 잘 지어놓은 건물이다.

한 마디로 잘 생긴 건물이다. 외벽을 모두 통유리로 만들어 놓아 겉으로 보기에 매우 멋있게 지은 건물

이었다. A는 B에 비해 매우 투박하였다. 하지만 지하철 역에 근접해 있는 A가 입지조건도 좋고, 대지

면적도 훨씬 넓었다. 층수도 A가 높고 건물 면적도 훨씬 컸다. B의 장점이라면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 겉이

매끈하다는 것 뿐이었다. 

G기업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A와 B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던 모양이다. H대표이사는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고,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때 내가 그에게 한 말이 위의 말이다.

두 개의 건물을 비교하면서 적정한 비유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당연한 선택을 두고 왜 고민하느냐는 의미

에서 던진 말이다.

"H사장님은 지금 조강지처를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애인을 구하는 것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지점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만약 당시 G기업이 B건물을 매입하였다면 임대료 수입도 별로 없어서 아마 대출이자 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부채가 많아 허덕였을지도 모른다.

일반 직원들 입장에서는 멋있게 보이는 건물로 출근도 하고, 번쩍거리는 화장실에서 용변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너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재정상태도 고려하고, 미래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시 비슷한 금액이었던 A와 B는 현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A가 B보다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 G기업은 사업도 번창하였고, A건물은 리모델링도 하여 현재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나는 조언을 잘 했고, 그는 결정을 잘했다. 

그는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지금도 하고 있으며, 그와의 인연은 여전히 끈끈하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선택의 길목에 있을 때가 많다. 물건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도 선택을 해야할

때가 많다. 

조강지처와 애인 중 누가 더 서방님을 위하는 사람일까? 우문이다. 그래도 애인이 좋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당연 겉보다는 내면을 더 중시해야할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보다는 내면이 충실한 생활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IBK 21기 동기 야유회  (0) 2019.07.09
멋있게 차차차 2  (0) 2019.06.20
특이한 금액(별칭 : 나는 속물이다 2)  (0) 2019.05.27
나는 속물이다  (0) 2019.05.17
계절은 또 가고  (0) 2019.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