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상에 굴비가 올라왔다. 웬 굴비냐고 물으니 "당신이 입맛없다고 하기에 사 왔다"고 한다. 얼마 주었냐고
물으니 "그런 것은 왜 묻느냐"고 하는 것으로 보아 금액은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딱 보기에도 크기가
작다. 우리 서민 수준에 맞는 가격대일 것이다. 이럴 때 싸구려니 뭐니 하면서 꼬치꼬치 묻게 되면 잘못
하다가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남편을 위해 정성스럽게 반찬을 만들어 내 놓으면 '고맙다'거나 '잘 먹겠다'
고 해야 되는데, 그 쉬운 것이 잘 안 된다. 쓸데없이 "어디서 샀냐?"거나 "얼마짜리냐?"고 자꾸 물어보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되면서 차츰 언성이 높아지다 보면 결국 사소한 것으로 다투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굴비가 좀 싱겁다. 싱거운 굴비를 보니 아주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IBK은행 W지점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지점에는 당시 많은 예금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고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따라서 현역으로 근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은퇴를 한 후 노후를 즐기는 분들로 전직이 화려했다. 직업으로는 의사나
교수출신이 많았고, 국회의원이나 고위직 공무원, 장성출신 등으로 과거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자주
얼굴을 보던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VIP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VIP는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PB 고객으로 예금실적이 우수한 자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 중에 당시 최고의 VIP라고
하는 몇 명이 있었다. 사업을 정리한 후 거액을 예금하고 있던 사람과 전직 의사이었거나 고위직 공무원
출신으로 고액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인격도 훌륭하고 겸손하였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금 좀 있다고 직원들을 엄청 괴롭혔던 VIP도 있었다. PB 상담실에서 연신 담배를 피워
다른 고객이나 직원들을 괴롭혔던 분도 있었고, 하루종일 응접실에서 지점장을 붙들고 자기와 놀아주기를
바라던 노인도 있었다.
W지점에 부임을 하고 처음으로 명절을 맞이했을 때이다. 그 지점에서는 오래전부터 최고의 VIP 고객
몇 명에게는 명절 선물로 "굴비"를 주었다. 상당한 크기의 '영광굴비'로 매우 높은 가격이다. 지금같으면
'김영란법'을 핑계삼아서라도 하지 않았겠지만, 수년간 이어져 온 전통(?)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사실 당시
지점 경비를 감안할 때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다른 것으로 선물을 할까 했는데, '지점장이 바뀌더니 선물이
형편없어졌다'는 말이 나올 것 같다는 직원들의 의견을 따라 예전처럼 하던대로 하였다. 당연히 그 뒤 다음
명절부터는 선물의 대상뿐만 아니라 품목도 바꾸면서 가격대도 대폭 낮추었지만, 당시 고가의 선물을 하면서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그런 굴비를 먹어본 적도 없고, 물론 지금까지도 그렇게 비싼 굴비를 먹어보지 못했다. 명절
선물로 나간 총 경비중 약 절반이상이 굴비값으로 나갔다. 상위 몇 명의 선물값으로 너무 많은 경비를 쓰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 VIP들에게는 저렴한 선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리가 없었다.
명절이 지나고 굴비를 선물받은 고객 중 한 명이 지점에 들렸다. 객장에 손님도 많은데 그 VIP는 창구
여직원에게 큰 소리로 말을 한다.
"이번 굴비는 지난 번과 크기는 같지만, 간이 싱겁더구만."
명절 선물 선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 여직원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객장엔 명절 연휴
직후인지라 많은 손님들이 있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니 PB팀장은 당황하여 그를 안으로 모신다. 우선
다른 고객들이 알게 될까봐 급하게 응접실로 모셨다. 그 노인은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또 큰 소리로 말한다.
"이번 굴비는 간이 좀 싱거웠어. 앞으론 간 좀 잘 된 것으로 보내줘."
그 분은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없이 던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듣는 나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직원들은 그런 굴비를 먹어본 적도 없다.
아무리 굴비 선물이 이 지점의 전통이라고 해도 그런 선물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말은 들은 나의 속에서는 이런 말이 막 튀어나오려고 했다.
"예~ 좀 심심했군요. 그럼 간장을 찍어 먹던지, 소금 좀 쳐서 먹으면 되지~ 그런 말을 다른 고객들이
들으라고 그렇게 큰 소리로 내뱉으면 굴비는커녕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고객들은 뭐가 되나?
말 좀 가려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불쾌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싫은 기색을 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는 엄청난 예금실적이 있는
최고의 VIP이니까 말이다. 서비스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비굴하게 웃으면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최근 짠 음식이 안 좋다는 말이 많아 당초 굴비를 주문할 때 좀 싱겁게 주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이드신 분 중에 혈압이 있는 분도 있다고 하기에 그리 한 것 같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음식이 좀 간간해야지. 그게 뭔가. 다음부턴 조심해~"
"예~ 알겠습니다. 다음부턴 입맛에 맞도록 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예금을 다른 곳으로 빼 갈까봐 전전긍긍하며 그의 비위를 맞출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
해도 나의 모습은 비굴한 모습이었다.
왠지 굴비를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원래 굴비(屈非)의 어원을 보면 이름그대로 뜻을 굽혀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비굴하게 그 사람 비위를 맞추며 지냈던 일이 생각나 씁쓸하다.
그나저나 요즘은 내 삶이 많이 싱거운 것 같다.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투덜거리지 말고 앞으론 내삶에
소금 좀 쳐 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은 싱거운 굴비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