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구멍난 행로 8

헤스톤 2018. 1. 29. 21:02


어찌하다보니 이야기가 예상보다 길어져 동력이 떨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그래서 이제는 앞 부분에다 던져놓은 낚싯대를 고기가 물든 안 물든 들어 올려야 될 것 같다.

그리고 사건 전개상 구멍난 시간들이 이제 자식들의 방황으로 종을 치게 되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까 고민 중이다.

대충 생각해 놓은 것은 있지만 생각을 비틀어 보는 것은 작가의 재량이라고 생각한다. 

 

 

8. 만남과 인연

 

   세상엔 예상치 못한 일이 다반사라고 하지만, 인연이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알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단짝으로 어울리며 평생을 함께 지낼 것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더니 결국 잊혀지고 마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어느 사람은 가벼운 만남을 가졌을 뿐으로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으로 여겼던 사람인데,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만남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머리에 남는 강도가 다르다. 횡과 종으로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시점에서 잊지못할 충격적인 만남은 어쩜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불꽃같은 만남이 여러번 겹칠 경우는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남이와 박세근의 첫 만남은 선남이가 명동의 K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다. 박세근이 직원들과 식사를 하러 그곳에 왔는데, 선남이가 박세근의 앞에서 서빙을 하다가 실신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음하는 일로 긴장을 하면서 장시간 서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음식 접시를 박세근의 앞에 놓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넘어지는 것이었다. 세근은 곧바로 직원으로 하여금 응급구조대에 연락을 취하게 한 다음, 선남이의 몸을 꽉 조이고 있는 유니폼을 느슨하게 풀어준 다음 식탁위에 있는 냉수를 얼굴에 뿌려 주었다. 그리고 가슴을 누르며 응급조치를 몇 번 하였더니 다행으로 선남이는 곧바로 의식을 회복해 일어났다. 선남이는 창피하여 그 분위기를 빨리 벗어나려고 했지만, 박세근은 선남이를 안심시키며 일시적인 보호자가 되어 병원에도 데리고 갔다. 검사결과 별 이상은 없었다. '미주신경성실신'이라고 하는데 병원에서도 특별한 질환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세근은 선남이게 몸 관리를 잘 하라는 말과 함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헤어졌다. 하지만 선남이는 도움을 준 세근이의 세심하고 자상한 모습을 자주 떠올리곤 하였다.

  

   두번째 만남은 선남이가 제과점에서 새롭게 아르바이트를 할 때이었다. 그 제과점은 박세근이 당시 가지고 있던 4개의 제과점 중 하나이었고, 제과점 앞에서 선남이가 불량배들한테 협박을 당하다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었다. 오래 전 선남이가 방황할 때 어울리던 불량배들 3명이 우연히 그 제과점에 왔다가 선남이가 그곳에서 근무하는 것을 보고는 괜히 시비를 걸었고, 다른 손님도 계시니 조용히 말하자면서 선남이가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들은 선남이에게 돈을 요구하면서 협박을 하다가 선남이를 그들이 타고 온 차로 납치를 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세근이 그 제과점에 오는 길에 자동차 뒷좌석에서 내리려다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세근은 곧바로 경찰에게 연락을 취했고, 기사로 하여금 그 차를 따라가게 하였다. 우선 자신의 제과점 제복을 입은 직원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였음을 직감으로 느꼈던 것이었다. 그 직원이 K레스토랑에서 강렬한 만남을 가졌던 선남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세근이는 불량배들을 제압하여 경찰에 넘겼으며, 선남이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번에도 박세근은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선남이는 그럴 수 없었다. 지난번 사건과 겹쳐서 박세근을 마음에 더 깊게 새길 수 밖에 없었다. 선남이는 박세근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인연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우연이라고 해도 우연이 3번이상 겹치게 되면 숙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박세근은 여러가지로 바쁜 생활을 하였다. 4개의 제과점에는 1주일에 한번 정도 들리지만, '제과제빵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도 해야하고,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는 겸임교수도 해야하며, 광고회사를 새로 인수하여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전처와 이혼한 이후 일과 결혼한 사람같았다. 자꾸만 커져가는 회사에서 직원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권선남은 그 회사가 박세근의 회사인 줄도 모르고 응시를 하였고, 정규직원으로 합격을 했다. 박세근이 어느날 출근하니 선남이 새로 들어온 직원이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여러번 만나게 된다는 것에 대하여 세근도 '신이 만든 조화'라고 생각하며 선남과의 인연을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선남이는 그제서야 박세근이 중견기업의 회장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남이는 처음엔 경리부서에서 근무하다가 3개월 정도 지날 무렵부터는 기존의 회장 비서가 출산휴가를 들어가는 바람에 박세근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세근의 일정을 체크하고 필요한 자료를 챙겨 주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박세근이 학교나 학원에 강의하러 갈 때 각종 학습도구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수행비서 역할도 담당하였다.


   박세근은 엄청 바쁜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강의 준비 등을 하였다. 간혹 누락된 자료를 가지러 선남이는 박세근의 저택도 출입하게 되었다. 박세근의 큰 집은 왠지모르게 훈훈한 공기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박세근의 사생활도 엿보게 되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가정부 아줌마의 요청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혹 그 아줌마와 집안 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아줌마가 휴가를 가거나 다른 볼 일이 있을 때는 선남이가 자원해서 가정부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간혹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박세근의 집에서 숙식을 하였다. 박세근은 분명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지만, "외로움"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안방이나 서재엔 언제나 외로움의 커튼이 쳐져 있었다. 선남이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이 사람을 위해 그의 허전함을 메꾸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세근의 매력에 빠졌고, 언제나 그의 곁에서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세근은 선남이가 선자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슴보다 머리를 앞세우려고 노력했다. 병원에서 만난 선자처럼 기겁을 하지는 않았지만, 세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세근은 선자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듯이 선남이를 다른 직원들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유능한 직원으로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이 돌싱이라고는 하지만, 25살의 나이차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회통념적으로도 너무 많은 나이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선남이었다. 어느 날 선남이는 세근에게 와인 한잔 사 달라고 하였다.

   "회장님은 정말 눈치가 없는 건가요?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 저는 말입니다. 회장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거예요. 저하고 결혼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그냥 회장님 곁에서 평생 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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