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는 말에 그만
육십 넘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된다"는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말도 있지만, 육십을 넘긴 사람의 얼굴에서는 얼만큼 고생하면서
살아왔는가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는 물론이고 과거의 직업도 대충 짚어볼 수 있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유추가 된다. 왜냐하면 대개 얼굴에 쓰여있기 때문이다. 내가 은행에 다닐 때 나는 학교
동창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얼굴에 "기업은행"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나오는 "비자트"의 대사가 떠오른다. "A man takes a job, you know and that job
becomes what he is.(너도 알다시피 인간이 한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그 직업이 그의 모습이 되는거야.)"
라는 대사이다. 나같은 경우 약 30년 가까이 IBK 기업은행 직원으로 지내다 보니 어느덧 내 이마에 "IBK"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동창이나 친목모임에 가면 은행 지점장을 오래 한 탓인지 '지점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 정말 오랫동안 종사했던 지난 날의 직업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각자의
얼굴에 새겨져 있는 듯 하다. 여하튼 나이를 좀 먹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대충 그의 과거를 알 수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입행 동기 모임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당시 내 옆자리에 초등학교 1~2학년이나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 2명을 양옆으로 앉힌 60대 중반의 그 애들 할머니가 있었다. 아마 손녀들을
데리고 어디를 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애들이 유별나다. 도통 몸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빨대를 꽂은 음료수를 마시면서도
천방지축이다. 그리고 그 애들 할머니가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말의 색깔로 볼 때
애들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른 승객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누구와 통화하는지 그 할머니가 사용하는 언어와 얼굴을 보는 순간 "술집여자"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냥 그 사람의 과거 직업이 그럴 것 같다는 것이지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빨간 물이
나올 것 같은 입술은 어느 잡지에서 본 '창녀의 입술(Psychotria Elata)'이라는 꽃이 떠오른다. 왜 그런 것들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그냥 얼굴에 쓰여있는 것이나 배어있는 자세 등을 볼 때 오랜시간 그런 곳에서 종사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 애들 옆에 앉아 있었던 내가 불편해진다. 자리에서 그만 일어서야 할지 말지를 미적거리고 있다가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옆에서 몸을 심하게 흔들며 음료수를 먹던 아이가 내 바지 밑부분에
음료수를 흘렸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 할머니는 나한테 음료수를 흘렸는지도 모르고 물티슈를 뽑아서
손녀 다리에 묻은 것만 열심히 닦아주고 있다.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참고 물티슈 한장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약간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한다.
"아~이고~ 묻었나요. 오빠!"
오빠라는 말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자기 손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조심하라고 했어~ 안했어~ 빨리 미안하다고 말씀드려. 오~빠! 미안해요~ 라고 말해!"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할머니가 나를 오빠라고 부른 것도 우습지만, 그 꼬마에게도 나를 오빠로 부르
도록 시키는 것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오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희한하다. 진정성을 크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 말 한마디에 상했던 기분이 사라진다. 그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니 애교를 가득 담은 눈웃음을 보낸다.
내 바지에 음료수를 또 흘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으로 자리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까~짓거. 바지야 세탁하면 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