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남을 웃기면 자신도 즐겁다

헤스톤 2016. 3. 24. 11:15

 

 

지하철에서 문이 열리고 한 할머니가 들어온다. 이럴 경우 몇 년전만해도 자동적으로 용수철이 튀듯이

벌떡 일어났는데 이젠 나도 나이 좀 먹었다고 눈치를 살피다가 일어섰다. 주위를 보니 전부 30대 이전으로

보이고 10대의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이 칸에서 나이가 제일 위일 것 같은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네!"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미안함을 섞어 한 말이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기분좋은

말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젊게 보이려고 머리를 매만져도 겉으로 나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아직 많이 젊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몇 살 먹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남의 나이를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노인이 될수록 남의 나이를 물어보곤

한다. 어떻게 보면 별 뜻도 없다. 그리고 한번 듣고는 금방 잊어 버리기 때문에 별 부담없이 대답해도 그만

이다. 그래도 나이를 말하려니 선뜻 입에서 나오지 않지만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좀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애기도 만들 수 있어요."

할머니의 수준에 맞게 재미를 조금 섞어 대꾸해주었다.

"하~ 언뜻 봐도 쓸만하게 보여..젊은 애들하고 한참 연애해도 괜찮을 것처럼 보이네."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못된(?) 것들은 둘의 대화에 피식거리고 웃는다. 이들의 눈은

주로 스마트폰에 있지만 힐끔거리며 할머니와 나의 대화에 귀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 다 보인다. 내 얼굴을

슬쩍슬쩍 보는 애들도 있다.   

올해 나는 회갑이 된다고 하면서 "아직 팔팔해 보이지요?"라고 하니까 할머니는 사투리를 섞어서 "팔팔한

정도가 아니라 인상 좋고 매너가 짱이어서 아지매들이 줄줄 따르겠어!"라고 한다. 그 말 한마디에 지하철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의 기분도 막 올라간다. 할머니는 양보받은 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것이고, 만약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면 경로석에 갔을 것이라고 한다. 몇 분 동안의

대화에서 할머니는 팔십 중반을 넘었고 지금 노래교실에 가는 중이라면서 재미있게 살으라고 한다.

할머니는 내리면서도 즐겁게 살으라고 당부하며 남들을 웃겼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듯 미소지으며 지하철

문을 나선다. 

무엇보다 그 할머니의 이가 참으로 고르다.  

 


 

할머니가 웃을 때 보이던 그 고른 이를 보니 약 20년 전에 돌아가신 작은아주머니가 떠오른다.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 같은 동네의 큰집(종갓집)에 작은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상대가

듣기 좋은 말보다는 자신이 부르기 편한 말을 사용하는데, 당시 동네 사람들의 말로 한다면 큰집 아저씨의

두 번째 마누라로 "첩"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작은아줌마'라고 부르도록 훈련을 받은 탓인지 누가

얕잡아 보는 투로 "첩"이라고 하면 오히려 그 말이 더 이상하게 들렸다. 나한테는 그냥 가까운 친척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되는 아줌마이었다. 얼굴이 조그맣고 까무잡잡했으며 성깔이 있는 인상으로 험한 말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간혹 쌍소리도 섞어가며 남들을 잘 웃겼다. 좋은 말로 하면 수시로 유머를 뿌리며

다녔다.

동네에서 유일한 친척이었던 그집을 자주 들락거렸었는데 큰아줌마는 작은아줌마에 대하여 한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큰아줌마는 작은아줌마와 비교해 볼 때 인물도 훨씬 좋고 인상도 좋았으며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셨는데 작은아줌마를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은

아줌마는 그집에서 유일하게 서른두개의 이를 다 가진 사람이었고, 그런 이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집이

잘 산다고 큰아줌마는 말하곤 했었다. 

 

남들이 모르는 부부간의 갈등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어떤 괴로움이 있었다면 세사람 중 누가 가장

힘들었을까. 작은아줌마일까? 아저씨일까? 큰아줌마일까? 내 기억으로는 모두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 나이가 제일 어린 작은아줌마가 먼저 돌아가셨고, 그 뒤를 이어

한달도 되지 않아 아저씨가 돌아가셨으며, 잔병 없이 매우 정정하셨던 큰아줌마도 그 몇 년 후에 돌아

가셨다. 돌아가신 순서대로 괴로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세분 모두 즐겁게 살면서 장수하였다.  

작은아줌마의 존재를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일부일처제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으로 어찌 보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주범이기에 한 평생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은

아줌마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하게 그집의 식구로 살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바꾸곤 하였다. 큰아줌마와도 조화를 잘 이루며 누구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살았다. 고른 이를 가진 입으로 끊임없이 유머를 구사하던 작은아줌마 덕분에 그집은 언제나 웃음 꽃이

피었던 것 같다.

 

웃음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다. 지하철의 할머니나 작은아줌마처럼 남들에게 웃음을 주며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힘들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

웃으면서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에게 웃음을 주며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은 말러 임성환님의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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