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본의 아니게 수필가라는 명찰을 달게 되었다. 그래서 SNS에 나의 이 소식을 전하면서 앞으로 좋은 글로
보답하겠다고 알렸더니 여기저기서 한턱 내라고 난리다. 과연 이것이 한턱을 낼만큼 자랑스러운 것이고 더 나아
가 영광스러운 것인지 조금은 당황스럽다. 대부분 최근 시나 수필 등 문학과 관련하여 등단의 속성을 모르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사실 속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무슨 건수만 생기면 한턱내라고 하는 무리들이 있다. 따라서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는 의미로 한턱을 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정말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슨 단체나 동네 모임에
서 한턱내라고 할 때 어느 수준으로 내야 하는지 분간이 안 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럼 한턱의 기준은 무엇일까? 누가 카톡으로 보내준 '한턱의 정의'를 보았다. 서울 남부지법에서 있었던 실제 민
사조정판례라고 하여 조회해 보았더니 1997. 7. 1.자 연합뉴스 기사로도 뜨는데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A가 B에
게 한 턱 쏘겠다고 하여 동네 단란주점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술값이 90만원이 나왔다. 그래서 A가 B에게 너무 부
담이 되니 나눠서 내자고 했고, B는 A가 한턱 쏘겠다고 해서 마신 것이니 자신은 못내겠다고 하여 서로 다투다가
경찰에 고소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판결까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이 재미있다.
"한턱이라 함은 맨 처음 주문한 것으로 국한함이 타당하고, 추가된 것은 마땅히 나눠서 내는 것이 맞다"라고 하였
다. 그래서 처음 주문한 20만원은 A가 부담하고 나머지 70만원은 각각 35만원씩 부담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한턱을 쏠 때는 소주 한병과 밥 한그릇을 먼저 주문하고 계속 추가주문을 하도록 하고, 한턱을 얻
어 먹을 때는 소주 한 박스, 맥주 한 박스, 고급 회코스를 시키면 된다"고 요령을 알려주고 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시골에서 아저씨뻘되는 분이 명문고인 D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동네가 축제분위기이었다.
동네사람들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고 그 집에서는 크게 한턱을 냈다. 그 당시의 한턱은 돼지 한마리 잡고 막걸리가
풍족하고 각종 부침개를 부치고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때 나는 D고교가 얼마나 유명한 학교이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맛있는 것을 먹으니 좋았고 나도 크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 유명한 D고교에 보기좋게 낙방을 하고 부모님에게 실망만 안겨 드렸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도 한턱 낼 만큼 부모님을 기쁘게 한 기억이 없다. 다만 지금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면 "우리
큰아들이 나를 닮아 시인 흉내를 낸다"고 좋아하시면서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술 한잔은 샀을 것 같다.
사실 가족들의 소원대로 무슨 단체장에 당선이 되었다거나 승진 혹은 시험 합격 등의 경우라면 기꺼이 낼 수도 있
겠지만 사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부풀려 평가하면서 한턱을 강요받는다면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꿀꿀하다. 약 2년전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어 내 시(詩)가 실린 월간지를 무슨 모임에서 한권씩 나눠줬더니
"시인이 되셨다"고 한턱내라고 추어올린다. 몇 명은 "시인이 되기 위해 고생했다"면서 책값이라고 얼마를 봉투에
넣어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인이라는 평생직업을 가졌다고 하면서 앞으로 무슨 경제적 도움이라도 되는 것으로
아는지 '한턱'을 외친다.
과거의 학습효과탓인지 이번에는 이러저러한 모임에서 책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팽개치거나 버릴 수
없는 귀한 책이기에 집사람이 다니는 골프연습장에 책을 비치해 놓고 원하는 사람들이 한 권씩 가져가게 하였다.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한턱내는 경우가 많다. 운도 많이 작용하겠지만 실력이 출중한 탓인지 스크린골프에서 홀인
원하는 경우가 많아서 받는 상금의 몇 배를 쓰기도 한다. 월례모임이나 여성들끼리 하는 무슨 시합에 나가면 어느
날은 우승을 하였다고 한턱, 또 어느 날은 메달리스트가 되었다고 한턱, 행운상을 받았다고 한턱..이런 식이니
안팎으로 한턱때문에 집안 거덜나게 생겼다.
그런데 조용히 생각해보니 예전에 그렇게 많았던 턱들이 이제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합격턱, 승진턱, 득남턱,
회갑이나 칠순턱, 집들이나 새차구입 등에 있었던 각종 턱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을 가지고 한턱을 낸다는 명분하에 가까운 이들끼리 서로 어울렸던 것 같다.
사실 누가 한턱을 내라고 하면 거부감을 가질 필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만약 건수가
없으면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한턱 쏘도록 하자. 그래 오늘 동네 모임은 내가 쏜다! 어디서? 호프집에서..
* 사진은 말러 임성환님의 작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