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미친놈

헤스톤 2015. 3. 19. 14:15

 

 

오래간만에 연락이 왔다. 약 10여년 전 업체 사장과 은행 지점장으로 인연을 맺고 수시로 연락하며 지내왔으나

약 4년전 내가 은행을 퇴직한 이후로는 뜸하게 연락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약 1년전부터는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연락이 왔다. 사실 이름만 떠올려도 반가운 사람으로 나보다는 14살이나 많으

면서 때로는 형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이다. 살다 보면 우연히 인연을 맺고 살다가 무슨 특별한 이유

도 없이 그냥 소원해 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그런 사람으로 분류되려고 하는 시점에 전화가 온 것이다. 반가움

에 10분이상 통화를 하였고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였지만, 어떤 모임을 함께 하는 사이도 아니기 때문에 어떻

게 될지는 모르겠다. 사실 다음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다음에 밥이나 한번 먹자

거나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는 말은 만나기 힘들다는 말과 똑같다.

 

그를 생각하면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약 10여년 전 거래업체사장들과 간담회를 할 때 나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오프닝 멘트로 당시 막

떠돌기 시작하던 유머중 '미친놈 시리즈'를 언급하였다.

"여기 계신 분들 나이가 모두 40은 넘기신 것 같은데, 미친놈 시리즈에 보니 40대에 처녀장가 가겠다고 선보러

다니는 놈은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혼자 계신 분이 있으면 처녀에게 대시하려고 하지말고

과부나 이혼녀를 알아 보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별로 보면 50넘어서 취직해 보겠다고 이력서들고

왔다갔다하는 놈이 미친놈이고, 60대에 사업하겠다면서 관공서 들락거리고 은행에서 대출받는다고 서류들고

설치는 놈이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또 70대에 골프 싱글하겠다고 개인레슨 받는 놈이 미친 놈이고, 80넘어서

그게 안된다고 비아그라 먹는 놈이 미친놈이며, 90대에 오래 살겠다고 정기 건강진단 받으러 가서 키 재고

몸무게 잰다고 줄 서있는 놈은 미친놈이라고 합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크게 웃는 모습을 보니 이만하면 시작 분위기를 잘 잡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손을 든다. 바로 그 사람이다. 모 대기업의 임원으로 근무하다 몇 개월 전 퇴직

한 후 신규로 사업자 등록을 내고 은행과 거래한지 얼마 안 된 기업의 대표이사로 자기가 만난 사람중 은행

지점장으로는 내가 처음이라면서 살갑게 다가왔던 사람이다. 

당시 그는 60중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그 업체에 신용보증기금의 신용보증서와 본인 소유의 주택을 담보로

필요한 금액을 대출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다. 사실 그때 그 업체는 오랫동안 그가 몸 담았던 대기업으로

부터 공사수주를 받아 일하는 것이었기에 비교적 쉽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오랜기간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으

면서 은퇴후 준비를 탄탄하게 한 탓인지 시작부터 좀 큰 규모의 자산을 갖고 있었으며 종업원수도 꽤 되는 기업

이었다.

여하튼 그때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60살 넘어 사업하겠다고 집 담보잡혀

대출받으려고 각종 서류들고 설친 내가 미친놈인것은 확실합니다만, 이런 미친놈에게 대출을 해준 지점장님도

미친놈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참석한 사장님들의 나이가 모두 40을 넘겼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그것에 초점을

맞춰 한 말인데, 60대에 사업을 시작한 그 사람으로써는 다른 나이대보다 60대의 말이 귀에 쏙 들어 왔던 것

같다.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머뭇거리며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팍 사그라

들게 된다. 그리고 원래 세상이란 모두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 더 많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원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예~ 맞습니다. 저는 미친놈입니다. 정상인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간담회 자리에서 미친놈 시리즈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우리 모두 무엇인가에 미쳐야 한다는 것입

니다.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학교다닐 때는 공부에 미쳐야 하고, 직장에 다닐 때는 일에

미쳐야 하고, 사장님은 사업에 미쳐야 하며, 저는 지점장으로써 여러분들 사업이 잘 되도록 지원하는데 미칠 것

입니다." 참석한 사장님들은 제일 마지막 말인 미친놈처럼 대출해 주겠다는 말이 확 와 닿았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아마 은행생활하면서 제일 열렬하게 받아 본 박수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얼마나 들으며 살아왔는가를 뒤돌아 본다. 좋은 의미에서의 미친놈 소리

정도는 듣고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나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 놓았던 의사나

열사들의 삶을 보면 당시 일반인들은 그 사람을 어쩌면 미친놈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닭의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직접 알을 품었다는 금세기 최고의 발명왕 에디슨은 얼마나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살았을까. 어떤 분야의 독보적인 위치까지 오르기 위해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노력한 인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이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같은 문명의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고은' 시인의 '미친놈'이라는 시(詩)가 떠오른다.

 

서쪽에서 해가 뜬다고 말하는 놈이 있어야 한다

그 놈이 세상의 잠을 깨운다

미친놈아 너 이 허울의 땅에 오라 

 

* 사진은 사진작가 말러 임성환님의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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