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봉합 시도 1
오제원 이사는 이대로 가면 회사의 몰락이 뻔하기 때문에 우선 급한 대로 노사갈등을 조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허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3층에 있는 회장실로 갔다. 노사 간 갈등이 있을 경우 노측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경우는 드물다. 사측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된다. 화합을 위해서는 갑이라고 여기는 곳에서 먼저 신호를 보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근로를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 쪽이 을이 될 수밖에 없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는 경우 강자가 먼저 굽히지 않으면 타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선 허방진 회장부터 만나러 갔다. 작업 현장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봉변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먼저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려고 갔다.
오 이사가 입사한 이후 허 회장이 주로 오 이사 방에 와서 업무 관련 이야기를 하거나, 담소를 나눴기 때문에 회장실을 자주 간 것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던 기억을 오 이사는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회장실과 연결된 비서실의 정수미 계장이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기 때문이다. 늘씬한 키에 깊어 보이는 큰 눈의 색깔은 스페인 여인의 눈 색깔을 닮았다. 외모도 유럽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직원으로 그녀의 이국적인 미모는 이상하게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였다.
그런데 비서실에 정수미 계장이 보이지 않는다.
약 2개월 전만 해도 비서실엔 부장급 직원과 대리급 직원 등을 포함하여 4명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 계장 홀로 비서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수차에 걸친 구조조정 탓으로 각 부문의 모자란 인원을 채우고자 비서실의 직원들을 각각 총무와 미래전략 부분으로 보냈기 때문에 정수미 계장만 그 큰 비서실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 이사는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회장실 문을 노크해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생산 현장에서의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일찍 퇴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 이사가 문을 열었는데, 저쪽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회장실에 딸려있는 안쪽의 침대가 있는 휴게실 쪽에 사람 모습이 보인다. 허 회장이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수미 계장이 서 있는 것이었다. 오 이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급하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위계에 의한 남녀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이상한 상상이 스쳤다.
그동안 직원들을 대하는 허 회장의 언행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건강한 신체인 탓 등으로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급 술집에 드나들곤 한 모습 등이 떠올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회사내에선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여 직원들을 상대로 집적댄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최근 회사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스트레스가 쌓여 직원들을 종으로 여기는 듯한 좋지 못한 태도를 보였지만, 평소 그는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좋은 성품의 소유자이었다. 사실 오 이사가 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 중 하나도 허 회장의 높은 인품이 작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있었던 방금 전에 본 모습이 아른거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회장은 그렇다 쳐도 평소 몸가짐이 단정한 정수미 계장은 절대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정말 정 계장에 대하여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생산 현장에서 엄청난 사건을 겪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이 와중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오 이사는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 이사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구매관련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면서도 머리가 복잡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린다. 회장 비서실의 정 계장이다.
"오 이사님! 아까 회장님 방에 오셨습니까? 왜 그냥 가셨나요? 지금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오 이사는 다시 3층에 있는 회장실로 올라갔다. 평소처럼 비서실에 앉아 있는 정수미 계장이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한다. 정 계장의 웃는 얼굴을 보니 약간은 기분이 풀어진다. 정 계장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회장실로 들어갔다.
"어~ 아까 왔었던 것 같은 대 왜 그냥 갔어?"
"예~ 회장님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신 듯해서요."
"아까 오 이사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몰라도 혹시 오해가 있을까 봐 말하는데, 내 등에 난 상처에 손이 닿지 않아 정 계장의 손을 잠시 빌렸었는데, 그때 오 이사가 나의 벗은 몸을 보고 이상한 상상을 할까 봐 말하는 것이네."
"생산 현장에서의 일은 얼핏 들었습니다만, 어떤 봉변이라도 당하셨나요?"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자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다가 현장의 어떤 기계의 날카로운 부분에 닿아 상처가 생긴 것 같아. 내 작업복도 그쪽이 완전 찢겨 있더군.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갑자기 현장 직원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옷이 찢기는 것도 몰랐으니. 무엇보다 등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크군."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회장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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