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불만 고조
기업이 힘들어지면 경영진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직원을 해고시키는 것이다.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대홍이 사장으로 있었을 때도 수억을 들여 만든 컨설팅 보고서에 따라 일부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천태운이 사장이 되고 나서는 수시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그럴 때마다 오제원 이사는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부하직원들 일부도 계속 내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좋은 일만 하면서 살기도 바쁜 데 간혹 악역도 해야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어쩜 조직생활에서는 악역을 잘 해야 자신의 위치가 더 다져지고 출세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누구라도 때때로 악역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 조직이나 자신이 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혹 드라마를 보면 악역이 제 역할을 잘 해야 드라마가 살 수 있고 그 배우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처럼 말이다. 오 이사는 "얼마나 악역을 해야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구매부문 직원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오 이사가 담당하고 있는 구매업무에서도 악역을 잘하는 자일수록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와의 관계에서 비슷한 품질이라면 가격을 깎고 또 깎아야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 된다. 상대 회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 하더라도 자기가 속해있는 회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근거 없이 후려치기만 하면 상대업체가 주저앉거나 거래가 끊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밀고 당기는 작업을 잘하는 직원이 되어야 한다. 어느 기업이든 판매가가 원가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거래를 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력업체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자신의 회사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구매부문 직원들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협력업체들과 가격 갖고 자주 실랑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부문장인 오 이사는 악역을 잘 수행하는 직원을 우선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하나케이시(주)가 잘 되느냐 좀 못되느냐의 문제라면 이렇게까지 악역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는 다르다. 오 이사 자신도 수시로 협력업체들의 원가분석을 하면서 직원들의 단가협상 작업을 지원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협력업체들도 원가절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을 안다. 자동화로 인원감축을 한다거나 단순 노무직에는 값싼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다. 제조업에 발을 담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오랜 기간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보았던 업체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가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살을 도려내고 뼈가 부러지는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라는 것 자체가 뼈를 깎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구조조정이라고 하는 것도 돈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1개월 급여 선지급과 더불어 퇴직금을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는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노동청에 진정을 내는 퇴직 직원들의 숫자가 늘어갔고, 결국 노동청에서 조사도 나왔다. 급한 불은 간신히 끄면서 갔지만, 불씨는 더 커지고 있었다.
자연 남아있는 직원들의 불만도 높아갔다. 계속된 구조조정 결과 남아있다는 자체도 고통이었다. 업무가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고용의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 출근한다는 것이 고통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직원들을 대하는 허방진 회장의 언행은 직원들의 불만을 더 높였다. 구조조정에서 제외된 직원들에게 자신이 무슨 큰 혜택이나 베푼 것처럼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고, 무엇보다 직원들을 마치 하인 내지는 종으로 여기는 언행은 회사 분위기를 완전 다운시켰다.
회사 내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직원들의 불만은 사업장에서 결국 터지고 말았다. 평소엔 잘 가보지도 않던 MM(Main Machine)이 있는 곳을 허 회장과 천 부회장이 들렸을 때의 일이다. MM 1대당 통상 직원 2 명이 관리하던 것을 수차례 구조조정 탓으로 직원 1명이 MM 2대를 관리하게 됨에 따라 주자재인 도체나 필름에서 에러가 발생하면 거의 반나절 내지는 하루 정도 그 기계의 가동은 힘들다. 그들이 방문했을 때 총 50 대의 MM 중 약 30%가 가동이 중지된 상태로 있었다. 당연 경영자 입장에서는 열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허 회장은 담당 부문장인 한대교 이사뿐만 아니고 관련 직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입에 담기 힘든 쌍욕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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