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18

헤스톤 2024. 1. 4. 06:17

 

 

18. 계속 부는 바람

 

 

박호진 상무는 천태운의 전무 승진 소식을 접하고 허방진 회장실로 갔다. 박 상무는 그동안 허 회장과의 관계를 그려보며, 자신이 실질적으로 이 회사의 2인자라고 여겨왔던 것을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우울해진 기분을 최대한 숨기고,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회장님! 천 상무를 전무로 승진시키셨더군요. 잘하셨습니다. 공석인 자리를 빨리 채운 것은 매우 잘하신 일이라고 봅니다. 저도 천 전무와 더불어 좀 더 큰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저의 친정 업체인 S전자가 저를 바라보는 눈도 있고 하니 저에게도 적절한 명함이 있었으면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도 승진을 시켜달라는 말로 천태운을 전무로 승진시켰으니 자신도 최소 전무는 시켜달라는 말이었다. 더 나아가 비어있는 사장 자리에 탐을 낸 것이다. 박 상무는 허 회장의 표정을 살피며 자기에게 기회를 준다면 CEO로써 멋지게 그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박 상무의 의도를 파악한 허 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속에 있는 감정을 쉽게 밖으로 드러낼 허 회장이 아니다.

"박 상무의 기분이야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아직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있으나 그리 알게. 그보다 지금 회사 사정이 예전 같지 못하니 우선 박 상무가 좀 더 실력을 발휘해 주길 바라네. 그리고 앞으로 임명될 사장은 일단 외부 인사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하네. 무엇보다 내가 박 상무를 아끼는 마음 잘 알지?."

박 상무는 더 이상 말해봐야 지금으로서는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톤으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허 회장은 천 전무를 불러서 박호진 상무의 컴플레인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기분 같아서는 이 기회에 박 상무도 날려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잘 안다. S전자는 하나케이시(주)의 최대거래처이다. 지금 박 상무를 쫓아 보낸다면 S전자에게 밉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서로의 기분이라도 풀 겸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골프&리조트 회원권을 이용하여 이번 주말 1박 2일을 서산에서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멤버는 매주 토요일마다 가는 고정 멤버인 허 회장, 천 전무, 박 상무와 오제원 이사이다. 

 

 

 

인사에 불만을 가진 임직원은 박 상무뿐만 아니었다. 결국 고문으로 물러나게 된 손천식 前(전) 전무도 답답하였다. 자신의 기술로 일으켜 세웠다고 할 수 있는 회사가 직원 인사로도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그는 후선으로 물러난 이후 각종 회의에도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고, 천 전무는 물론이고 직원들과도 대면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 탓으로 언제부터인지 그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허 회장이 모른 척하며 지냈다. 손 고문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는 분명 구멍가게 수준의 회사를 중견회사로 키우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런 일등공신을 이렇게 대접하는 것에 대하여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은 오 이사도 착잡하였다.

국가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상필벌이 잘못되면 조직은 균열을 필연적으로 부른다.  무슨 민주화 운동을 했다거나 대형 사고에서 목숨을 걸고 인명을 구했다거나 하는 것도 신상필벌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큰 다툼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말할 것도 없다. 보상이라는 것이 엉뚱하게 이루어지면 그 회사의 분위기는 가라앉게 된다. 

 

오제원 이사는 심란했다. 

박호진 상무가 컴플레인을 제기한 며칠 후 예정대로 허 회장, 천 전무, 박 상무와 오 이사는 서산에 있는 골프 앤 리조트에 갔다. 오 이사는 리조트의 발코니에 나와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탓으로 근처의 나무들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나뭇잎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세상을 생각하다가 기울어진 나무들을 다시 보았다. 한참을 보았다. 오 이사는 그 나무들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이사는 주머니에서 볼펜과 수첩을 꺼내 자신의 모습을 끄적거렸다. 

 

 

 

 

기울어진 나무      

 

 

바르지 못하다고 욕하지 마라

기울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똑바로만 가서는 목적지에 갈 수도 없고

살고 있는 지구도 기울어서 돌고 있다

다행인 지 불행인 지 휘어지고 볼 품 없어

번개도 비껴가고 연장도 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운 것은 절대 아니다

나의 부모도 이리될 줄 알지 못했다

변명처럼 들리는 말 몇 번이고 말하지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내 의지가 아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봤지만

이렇게 바람 불 줄 알지 못했다

 

동정의 눈빛은 이제 사양한다

하루종일 비린내와 모래를 뒤집어쓰고

모진 풍상 없는 날 하루도 없었지만

이리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 여기며

가지 뻗어 꽃 피우고 잎 키우며

살 만큼 살려고 애를 쓰고 또 써 본다

 

제발 못났다고 침 뱉지 마라

남보다 좀 더 힘든 모습으로 살았을 뿐

누구를 탓하거나 해 끼치며 살진 않았다

피사의 사탑도 오랜 세월 묵묵히 견디듯이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지 몰라도

주어진 삶은 아주 착실하게 쌓아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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