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14

헤스톤 2023. 8. 17. 07:43

 

14. 더미필름

 

   오제원 이사는 입사 첫날의 실망을 접어두고 나름 자기 몫을 하려고 애썼다. 협력업체들에게 각종 분석자료를 내놓으며 자재 가격을 내려서 회사 이익의 극대화를 위래 작전을 짜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회사 전체의 결과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불량으로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해 법인은 다른 법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회사의 수익구조는 시간과 비례하여 악화되고 있었다.

 

   오제원 이사가 담당한 구매에서 열심히 원가 절감을 한 보람은 빛이 나지 않았다. 경쟁이 심해지면서 제품의 판매원가는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제품수도 늘어났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임원은 물론이고 부, 차장급 직원들끼리도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어느덧 회사의 색깔이 되었고, 경쟁업체나 협력업체에서도 다 알게 되었다. 주 판매처인 S 전자나 L 전자에서도 알게 되어 웬만하면 이 회사 제품을 멀리하려고 하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상황을 허 회장은 외면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 원인을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며 근본적인 문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래를 어둡게 하였다. 인재라고 하면서 그 많은 인원을 영입하고는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다. 처음 영입할 때는 치켜세우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깎아내리기 바빴다. 영입한 사원이 조직에 흡수되지 못하거나 기대 이익에 미치지 못하면 그 정도는 더 심했다. 인재라고 영입하고서는 1회 용품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고, 사표를 쓰고 나간 직원들은 모두 회사의 적이 되었다. 이는 결국 경영진의 나쁜 세평과 더불어 회사의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오제원 이사는 자신이 관할하는 자재 창고로 가서 재고조사를 하며 1회 용품인 더미필름을 바라보았다. 더미필름은 원자재도 아니고 부자재도 아니다. 사실 원자재인 도체, 필름, 보강판을 제외하면 오 이사 자신이 직접 부자재를 세밀하게 보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더미필름은 재고조사서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물품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는데, 구석에 있는 그 물품들을 보니 인재라고 영입했다가 내쳐진 직원들이 떠오르 것이었다. 더미필름 앞에서 그냥 한참 서 있었다.

 

 

    더미필름의 한마디

 

   원자재도 아니고 부자재도 아니다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백팔십도 熱속으로 들어가

   귀하신 몸들이 매끄럽게 붙도록 해주면 된다

   붙어먹은 것들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지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고 죽어간

   무명용사는 차가운 구석에서 처량하다

 

   한번 사용하고 나면 버려지는 역할

   재활용도 안 되는 삶

   원자재 같은 인생도 아니고

   부자재 같은 인생도 아니며

   일회용 소모품으로 살다 가는 신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쓰레기들을

   어디로 치울까 고민하는 나에게 

   이름마저 사라진 이놈들은 말한다

   너는 한 번이라도 무엇인가를 위해

   백팔십도의 情熱로 목숨을 걸어보았느냐고

 

 

 

* 더미필름이란 원자재인 도체와 필름들이 매끄럽게 붙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림질할 때 통상 양복이 번들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천을 대고 다리는 데, 더미필름은 이런 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한번 사용 후에는 버려진다. 필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름도 없이 양질의 제품을 위하여 화끈하게 한번 살고 간다.

 

 

   오제원은 시를 지으면서 얼핏 그런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사람이 시를 쓴다. 사회나 회사 같은 조직의 각종 비리나 불의에 대하여 직접 대항할 자신이 없는 자들이 그럴듯하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감추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悲慾(비욕) - 16  (4) 2023.12.10
悲慾(비욕) - 15  (49) 2023.09.16
悲慾(비욕) - 13  (12) 2023.07.31
悲慾(비욕) - 12  (17) 2023.07.23
悲慾(비욕) - 11  (19) 2023.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