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명순이 아버지 1

헤스톤 2019. 1. 10. 11:22

기해년 새해를 맞이하여 단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빌려 짧은 글 하나를 몇 차례에 걸쳐 써 보려고 합니다.

나중에 이 글이 소설이 될지 아니면 그냥 잡문이 될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머릿속의 줄거리를 펜으로 굴려 봅니다.

물론 앞으로 수정이나 퇴고는 여러번 있겠지만, 큰 줄거리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명순이 아버지


1. 바가지 꿈

 

둘레길은 등산과 달라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집 앞에 있는 산길을 걷다가 벤치에 잠시

걸터 앉았다. 그런데 모르는 여자가 내 옆에 앉는다. 조금만 더 가면 다른 의자도 있을 터인데, 왜 하필

내옆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지하철이나 버스같은 대중교통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괜히 불편해진다. 그렇다고 그 여자가 앉자마자 곧바로 일어선다는 것도 어색하다.

어쩌면 이 여자가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거나 아니면 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가슴이 뛴다.

그 여자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을 가득 담은 바가지를 들고 있다. 물을 먹는 듯 하더니 입안에 물을 물고

있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안에 있는 물을 내 입에 넣어주려고 한다. 그녀의 입술로 내 입술을 연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꿈이었다.

꿈에서 깬 이후 다시 잠을 청해도 오질 않는다. 다시 잠을 잔다고 해도 그 꿈이 계속 이어질리 없기에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리고 그 바가지도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아침부터 꿈 생각으로 뒤숭숭하다.

 

꿈에서 깬 지금 이 상황도 혹시 꿈일지 모른다. 물론 이 상황은 당연히 꿈이 아니지만, 이 상황도 꿈이라고

보고 깨는 경지에 도달한다면 대각(大覺)의 경지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온 약 60년의 

삶들이 모두 꿈이라고 보고 꿈을 깨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년시절로

돌아가 꿈을 깨서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상상을 하다가 출근을 하였다.   

월요일 아침부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보내다가 주간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진동 모드의 핸드폰

이 심하게 몸을 떤다. 모르는 번호이다.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라면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010으로 시작

되는 번호이다.



"혹시 이제남씨인가요? 저 재근마을 새동네에 살던 명순인데, 혹시 기억나나요?" 

처음 들어보는 아줌마 목소리이다. 잠시동안 두뇌의 기억세포들을 총 가동시킨다.

'재근마을과 새동네'라는 말에 약 55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는다.

"명순이? 우리 앞집에 살던 명순이 맞습니까?"

"고맙게 날 기억하네. 어렸을 때 너 데리고 산에 가서 칡 캐고 놀다가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너의 엄마한테

엄청 혼났던 명순이 기억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 기억이 지워질리 없다. 해가 짧은 늦가을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귀한 아들을 찾아 온 동네가 시끄러웠던 그 날이 기억나지 않을리 없다.

"이게 얼마만이야.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어?"

시골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한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는 명순이다. 그녀의 주소를 아는 사람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아는 동창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이 온 것이다.
"내 사촌이 우리 초등동창인 옥자와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지난 주에 옥자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옥자와

통화하다가 제남씨 번호를 알게 되었어."

"정말 얼마만이야. 반백 년도 훨씬 넘었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가물거리는 기억속에 반백년도 더 지나서 앞집에 살던 명순이의 전화를 다 받아본다. 반가움에 이러저러한

말을 나누기는 하였지만, 남자와 여자의 통화는 여자끼리의 통화처럼 길지 않다. 명순이는 지금 사는 곳이

"김유정 문학관"과 가까운 강원도 시골이라고 하면서 박과 식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박도 종류가

참 많다. 바가지용 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선 식용과 관상용이 있다. 조롱박도 종류가 다양하며, 공예용

으로 키우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혹시 바가지를 들고 있던 어젯밤 꿈의 그 여자가 명순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나는 유년시절로 돌아갔다.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순이 아버지 3  (0) 2019.01.29
명순이 아버지 2  (0) 2019.01.17
구멍난 행로 10  (0) 2018.02.15
구멍난 행로 9  (0) 2018.02.05
구멍난 행로 8  (0) 2018.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