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정말 미안해

헤스톤 2014. 4. 28. 18:29

 

 

 

 

   세월호 참사에서 무엇보다 어린 학생들의 수많은 희생이 너무 마음 아프다. 어른들의 말을 믿고 어른들이 곧 구해줄 것으로 믿었던 아이들에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미래를 움켜쥘 손이었는데 건져올린 시신들의 손가락이 대부분 골절되어 있다는 뉴스를 듣고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직도 차가운 물속에 있을 애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사고발생 5일이 되는 날까지만 해도 일말의 희망을 안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었다.

   '오늘도 수시로 바다로 갑니다. 업무를 하면서 바다로 가고 이번 주에 해야할 일을 체크하면서도 바다로 갑니다. 봄에 활짝 핀 꽃을 보면서 바다로 가고 글을 쓰면서도 바다로 갑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바다로 가고 숨을 쉬면서도 온통 바다에 가 있습니다.' '그 놈의 바다가..그 바다가 갈매기 날고 파도소리 들리는 바다인줄로만 알았었는데 말입니다. 특히 애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립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어리고 말 잘 듣는 착한 애들에게..왜 이런 일이..

   처음 참사소식을 듣고는 도와달라고 두손을 모았다. 제발 도와달라고..간절하게 기도를 올렸건만 이젠 희망이 낙담으로 낙담이 분노로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의 무능과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분노가 치민다. 이것밖에 안되는 나라가 싫어진다. 대한민국이 과연 제대로 된 국가냐며 가슴을 치는 어느 엄마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참담하다. 자식대신 저 뱃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울부짖는 엄마, 저 조명불빛이 있는 바다밑에 내 딸이 누워있다고 오열하는 엄마.. 나도 조금은 안다. 나 역시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로써 그 심정을 어느만큼은 안다. 나의 지나온 시절중 가장 큰 상처이고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가슴아픈 일중의 하나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은 것..당시 너무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접고 싶었다.

  

   충주교회묘지 435

   묘지번호 435 라는 숫자가 가슴에 박혀 26년이 넘도록 떠나지 않는다. 내 아들 박상원 아브라함의 묘소이다. 당시 아들을 먼저 보낸 나의 심정을 기록한 글을 몇 자 옮겨본다.

 

상원아! 나의 아들 상원아! 지금 어디 있느냐?

아빠가 죄인이로다. 지금이라도 아 빠빠빠 하면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릴 것만 같은데 왜 이렇게 공허하고 허전하단 말인가. 짝짜꿍도 하고 곰지곰지도 하면서 웃던 너. 잘 대해주지도 못하는 아빠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좋아서 소리치던 너. 엄마 머리칼을 잡아 당기며 잘 했다고 해 달라던 너.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가는 길도 지켜보지 못한 아빠가 죄인이로다. 아빠는 지금 피눈물을 흘린다. 많은 이들로부터 귀여움을 받던 너를 잃고 지금 나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아~ 내 아들 박상원 아브라함! 왜 이렇게도 가는 길을 서둘렀느냐. 부모의 짐을 덜어 주려고..효자노릇하려고.. 이 자식아! 이 자식아! 진정 너는 간 것이냐? 

아~ 내 아들 박상원 아브라함 상원아!

상원아.. 내 아들 박상원아.. 대답좀 하여다오.. 내 품에 안겨다오..

지금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아빠의 죄가 많아 그렇게 태어난 것이냐. 너와 내가 함께 다니던 길이 생각나느냐..이곳저곳 갔던 곳이 생각나느냐. 내 가슴에 못을 박고 어디로 간 것이냐. 눈물이 계속 쏟아진다. 아~ 내 아들..내 아들..

 

아브라함

 

따뜻한 품이 그리워

새하얀 마음으로

싸늘한 대지를 멀리하였나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서

깨끗한 몸으로

부드러운 하늘을 바라보았나

 

돌아오라 아브라함

밝은 얼굴 다시보자

소리치거라 아브라함

웃는 소리 다시듣자

 

입맞춤의 그것들을

그 자리에 둔 채로

그렇게 서두르다니

아브라함 들리느냐

부모의 애끓는 소리가

 

 

   세살도 안된 어린 아들이 죽어도 이렇게 슬펐는데, 이번 세월호 참사로 고등학생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다시 볼 수 없는 깔깔거림이나 재롱들이 아른거리며 그 어린 것을 땅에 묻을 때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는데.. 다 키운 자식들을 바다에서 꺼내고 가슴에 묻어야 할 부모들의 슬픔은 무엇으로 견줄까? 악몽을 꾸었다고 믿고 싶지만 꿈에서 깨어나도 슬픈 현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이고 기성세대라는 것이 슬퍼진다.

   애들아!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그동안 적당하게 살거나 그러한 것을 방관하면서 살아온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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