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시적표현(詩的表現)

헤스톤 2013. 11. 7. 18:11

 

                        

 

              

"빈수레가 되어 단풍으로 곱게 물든 오솔길을 걸으니 반나절도 안돼 가을이 가득찬다. 가을은 아무리 과식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맑고 고운 하늘 한번 바라보면 속이 시원해진다."

이렇게 써 놓고보니 나름 詩的인 표현같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치며 별로라고 할 지 몰라도 나는 수첩에 이 글을 적으며 스스로 만족한다. "왜 이렇게 내 머리에서는 자꾸 멋있는 표현이 나오는 거야(?)" 하며 한줄더 쓴다. 

 

 

"낙엽의 색깔은 사계절을 버무려 놓은 저녁노을이다. 아버지를 닮은 것만 같은 이 색깔에 얼굴을 묻어본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오랜 시간 연습한 피날레의 아름다운 합창이 들린다. 그런데 이 냄새 너무 좋다. 좋은 냄새가 풍긴다." 

여기까지 쓰고 앞을 보니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늘씬한 여자가 지나간다. 멋있다. 아니 향기롭다. 아니 그럼 이 냄새가 그 냄새였었나. 그 뒤로는 아무 생각도 안난다. "가을을 과식한다"는 말은 "사랑이나 과식해 봤으면 좋겠다"는 상상으로 바뀌고,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것 먹다가 설사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바뀐다. 오늘도 더 이상 시상을 떠올리기는 틀린 것 같다.

 

 

시인이며 소설가인 정현종 교수님의 "한 꽃송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한 꽃송이

  

                                 시인/ 정현종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쪽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詩人은 복도에서 한 여학생의 예쁜 다리를 본 것 같다. 그것이 눈앞에 어른거려 골똘히 생각하며 걷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동료가 "시인이니까 시상에 잠겨서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겠거니.." 하며 말을 건넨다. 그 말을 들은 시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지나친다. 어찌보면 시상(詩想)은 커녕 전혀 시적이지 못한 여자다리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에 잠긴 시인은 쪽집게라는 반전을 얻는다. 말하자면 그게 바로 시라는 인식이다. 한 꽃송이(詩)를 예감한다고 한다. 예쁜 여자 생각하는 것도 詩이다. 어찌보면 일상생활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꽃이 피는 것도 시이고 꽃이 지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시이고 세상이 바뀌는것도 시이다.  봄이 왔다고 수줍은 듯 고개를 살며시 내밀던 연두색의 뽀오얀 새순도 시이고 화려한 색깔로 모습을 바꿔 단풍으로 곱게 지는 낙엽도 시가 될 수 있다.

 

이러저러한 모임에 가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詩人이 되더니 시적으로 말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엄청 간지럽고 때로는 쑥쓰럽다. 내 머리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지난번 학교 동창모임에서는 함께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귤이 나왔다. 껍질에 칼집을 내서 6등분으로 벗겨 놓았다. 껍질을 잘 말아서 꽃받침 모양이 되게 다듬어 놓은 것들이 좋아 보였다. 어렸을 때 골목길에서 나와 마주치자 얼굴이 달아오르던 여자아이가 생각나서 "시골길에 핀 주황색의 코스모스처럼 생겼다."라고 하였더니 역시 시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게 표현한다고 옆에 앉은 친구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고맙긴 하지만 그냥 좀 간지럽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좀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나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옛날이나 시 쓴다고 껍적대는 지금이나 똑같은 나다. 

오늘 같은 날엔 맑고 고운 가을만 먹고 살지는 않아. 나도 이쁜 여자 보면 자꾸 눈길이 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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