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때 성묘시 고조부모 산소부터 시작한다. 고조부 윗대의 분들도 계시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소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장손이 아닌 탓도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때 큰집 아저씨 따라 윗대의 어른들 산소에 가본 것 같은 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조부나 증조부 차례는 큰집에서 지낸다. 내가 차례를 지내는 증조부는 친 증조부의 동생되는 분(나의 할아버지가 그 분 양자로 입적)으로 산소는 없다. 따라서 성묘순서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아버지로 이어진다. 산소관리는 증조부모 산소부터 내가 한다. 증조부모는 내가 장손이 아님에도 관리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 지에 대하여는 언급을 흐지부지 하고 싶다.
아래 사진은 고조부모 산소에 있는 비석이다. 고조부는 종2품 벼슬을 하신 분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기에 고향 동네 입구에 큰 비석이 있고, 동네의 "삼남공원"에 행적비도 있다. 그 공적은 매천 황현선생님의 "매천야록"에도 나온다. 제원초등학교의 전신인 제남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묘비명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박(朴)공 항래(恒來)지묘, 配 정부인(貞夫人) 인동 장씨 부우이다. 일품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은 정경부인이고, 2품의 아내는 정부인이다. 고조모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仁同 張氏로 고조부의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고조부는 금사공(錦士公)이라고도 하는 데 그 분의 직도정신을 높이 사 동네 입구에 "직도문화로"(直道文化路)라는 비석도 고조부 비석옆에 있다.
우리집안은 다른 집들과 반대로 앞에서 보아 남자가 오른 쪽, 여자가 왼쪽이다. 지방도 그렇게 쓴다. 돌아가신 조상께 절을 할 때는 사배를 한다. 다른 집들처럼 재배를 하지만 할 때마다 고개를 한번 더 들었다가 다시 수그리기에 사배가 된다. 절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보통 집들보다 약 2배이상 걸린다.
아래 사진은 증조부모의 비석이다. 고조부모의 비석과 다르다. 증조부가 왼쪽에 있다. 묘비명은 진해군수 밀양박공 위 노원지묘(鎭海郡守 密陽朴公 위 魯源之墓) 배 숙부인 평택임씨 합폄부좌(配 淑夫人 平澤林氏 合폄附左)이다. 숙부인은 정3품 벼슬을 한 사람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이다. 고조부가 워낙 큰 인물인 탓인 지 증조부에 대한 말은 많이 듣지 못했으며 진해군수를 지냈고 증조모는 평택 임씨이다. 문제는 증조부와 증조모의 위치가 다르게 비석의 글이 새겨졌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중에는 산소관리나 제대로 될 지 모르겠다.
아래사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비이다. 할아버지는 위 朴魯源 증조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의 동생(朴魯壽)이 자손이 없어 양자로 갔으나, 묘는 증조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부모곁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 탓도 있겠지만 위 증조부모와 조부모의 산소관리는 내 차지이다. 할아버지는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 그냥 마음씨 좋은 한량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안다.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아버지 형제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신 분을 제외하고는 3남2녀인데 지금은 그 분들도 모두 돌아가시고 막내고모만 살아계신다. 조부님은 장남이 아니기에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일제시대를 거치며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였다.
묘비명은 운곡 밀양박공 용규, 귀성 경주이씨 채봉지묘(雲谷 密陽朴公 龍圭, 貴星 慶州李氏 彩鳳 之墓)이다. 할머니는 경주이씨이다. 할아버지의 존함은 박 용규이고, 할머니의 존함은 이 채봉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할머니는 중학교 2학년때 돌아가셨다.
아래 사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비명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약 6년전에 세우셨다. 어머니는 물론 현재 대전에서 살고 계시고, 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신 지 5년이 되었다. 묘비명은 현산 박종기, 해윤 육춘자 지묘(賢山 朴鍾琦, 海潤 陸春子 之墓)이다. 부모님은 상당기간 원불교에 다니셨고, 아버지는 그 곳으로부터 현기(賢琦)라는 법명을 받았다가 현산이라는 법호를 받으셨다. 해윤은 어머니의 법명이다. 어머니는 옥천 육씨이다. 나도 어렸을 때 법명을 받은 것이 있는 데 희태(喜泰)이다. 아버지는 제원면장을 약 10년 하셨고 동네 "삼남공원"에 詩碑가 있다. 정식으로 문단에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쓴 시보다 더 많은 시를 아버지는 남기셨다. 어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이며 시인이다.
아래 사진은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 모습이다. 아버지는 화장을 하였기에 묘의 모습은 없다. 사진 왼쪽으로 돌아가면 증조부모의 산소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특이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장자가 아니듯이 아버지도 장남이 아니다. 장남이 아닌 분들이 돌아가셔서는 부모곁에 있게 된 것이다. 산소 윗쪽으로 대나무들이 많다. 매년 쳐 내지 않으면 대나무가 영역을 침범하여 자꾸 내려온다. 관리를 조금만 소홀히 하면 잡풀도 우거진다. 평소 아버지는 국화를 좋아하셨기에 오른 쪽 비석옆에 국화 한그루가 보인다.
나는 분명 밀양 박가이다. 그러나 인동 장씨나 평택 임씨, 경주 이씨, 옥천 육씨 등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대한국민이면 아무리 멀어도 대부분 몇 십촌이내에 들어온다. 이젠 지구촌이라는 말도 있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여야 한다. 다른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삼남공원에 있는 "상회제원비"(常懷濟原碑)이다. "세계동가 인류동포 제원동기"(世界同家 人類同胞 濟原同氣)라고 새겨있다. 세계는 모두 같은 집이고, 인류는 모두 동포이며, 제원(고향 지명)사람들은 같은 동기간이라는 말로 알고 있다.
우리집안은 고조부(박항래)로 인해 살은 없어도 뼈대있는 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은 잘 알지도 못한다. 알아주는 이도 거의 없다. 후손들은 과거에 얽매어 있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쁜 짓 안하며 산 것만을 자랑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이름 석자 더럽히지 않으며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조금만 더 진일보된 삶이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