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절

잊을 수 없는 사람

헤스톤 2012. 7. 19. 21:46

 

 

 

정말로 오래된 일이다. 때는 1974년 늦여름..왜 문득 이 일이 떠오르는 지 모르겠다.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나보다 몇 살위로 추정되는 착한 얼굴의 여자라는 것만 안다.

  

   촌 놈이 서울에 처음 왔다. 정확히 기관명은 생각나지 않지만 각종 음료수를 시험하는 곳인 데, 1명인가 2명인가를 뽑는다고 하여 시험보러 왔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같은 학교 동창 7~ 8명이 왔다. 그 곳에 입사한 1년선배가 자랑(대한민국에서 나오는 음료수는 다 시험해 보는 곳으로 지난 여름 물을 마셔보지 않고 지냈다는 등)을 하며 원서를 보내주어 시험장소를 찾아왔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역 앞에 큰 건물이 있었다. 눈앞이 휘둥그레지었다. 대우빌딩이었는 데, 하늘높이 솟은 건물에 크게 압도되었다. 그 때까지 그렇게 높은 건물은 처음 보았다. 촌 놈이 서울에 처음 온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타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아는 것은 주소 하나뿐이다. 누군 가의 인도로 역에서 왼쪽으로 걸었다. 매캐한 냄새와 더불어 인상이 별로 안 좋은 인간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날씨는 왜 이리 더운 지 아직 여름이다. 당시는 무슨 다리인 지 몰랐는 데, 염천교를 지나 줄지어 있는 구둣가게들을 바라보며 무슨 극장(?)앞 시내버스정류장에 갔다. 각종 차량들과 사람들로 정신이 없고 매연으로 인상이 쪼그라든다.

   일행중 누군가가 길을 물었다. 버스를 기다리다 질문을 받은 그 여자분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 여러명이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서울지리를 생판 모르는 학생들 모습이다.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 어떻게 가야할 지 모르는 우리들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시골에서 시험보러 왔다는 데 말이다.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수수하지만 깨끗한 옷차림으로 무슨 장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분위기로 보아 대학생은 아닌 것 같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어느 집 가정부가 아니면 그냥 집안 일을 돕는 평범하면서 약간은 못 사는 집의 딸로 보였다.

   어느 학교냐고 하였다. 충고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충고라고 하면 충암고로 생각한단다. 나는 어렸을 때 서울에는 고등학교가 4개만 있는 줄 알았다. 경기, 경복, 서울, 용산고가 있고 그 중 경기고가 가장 유명한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 경기에서는 경기고, 대구 경북에서는 경북고, 부산 경남에서는 경남고, 대전 충남에서는 충남고(ㅎ~ 이건 아닌가..) 여하튼 우리 지역에서는 자식농사 성공했다고 알아주는 명문고(?)를 잘 들어보지도 못한 학교로 알다니..우물안 개구리인 우리끼리 투덜거리고 씁쓸해 하였다.

 

   기다리는 버스가 왔는 지 타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행사 가이드 따라가듯이 줄지어 올라탔고 그 녀가 우리 모두의 버스값을 지불하였다. 몇 정거장 지나 아현동 어느 곳에서 내렸다. 그 녀는 자신의 채소(?) 짐을 들고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주소를 보며 골목 여기저기를 누볐다. 파출소나 복덕방 같은 곳에 들어가 길도 물어 보았다. 오르막길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그 녀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동네 지리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졸졸 따라다니며 약 1시간은 헤맨 것 같다. 그러다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한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은 시험 잘 보라고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아까 지불한 차비라도 거둬서 주려고 하였더니 웃으면서 사양한다. 괜찮다고 한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길을 가장 친절하게 안내한 사람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그 분의 고운 마음씨와 더불어 깔끔한 모습이 오늘 갑자기 머리속을 맴돈다. 

 

 

- 오늘(2012. 7. 22) 문득 당시 함께 시험보러 왔던 애들끼리 남산에서 사진 찍은 것이 기억 나 이 곳에 올려본다.

  (왼쪽에서 4번째가 박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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