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절

고조부의 눈물

헤스톤 2013. 11. 25. 18:03

 

 

 

  (고조부의 칠순 존영)

 

 

나는 고조부를 뵌 적이 없다. 나보다 약 100여년전에 태어나셔서 내가 태어나기 약 20여년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분이 큰 일을 하셨다는 소리는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 후손들 중 그 분만한 인물이 없다는 동네어른들의 말도 많이 들었다. 한마디로 안타깝다는 말들이었다. 고조부가 인물은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인물 천냥, 말 천냥, 글 천냥이라고 해서 삼천냥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당시 천냥은 엄청 큰 숫자이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고 해서 서울의 천호동이라는 동이 있듯이 말이다.

 

동네 입구부터 몇 군데 그 분과 관련한 비석들이 있다. 후손의 한사람으로써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조부가 조선을 위하여 큰 일을 하였음에도 말이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영국속담이 있다. 나는 뒤집어서 말하고 싶다. "반짝이지 않는다고 모두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매천 황현 선생과는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안다. 구례군수시절 매천선생에게 벼슬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은 여기저기 있다. 매천선생이 1910년 9월 10일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심정이었을 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후학들을 챙기며 사는 것이 나은 것인지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은 지 당시로써는 판단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매천선생처럼 자결했다면 길이 남는 역사의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힘들게 사시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인 1930년대로 돌아가서 고조부의 심정을 나 나름대로 상상하며 나열해 보았다.

 

 

차라리 자결이나 할 걸

치욕스런 하늘을 보고 사느니

일찌감치 땅속으로 들어가

독립의 뿌리나 키울 걸

나라가 망했는데

벼슬이 무슨 소용이고

가르치는 것이 대수이겠는가

글 줄이나 읽는 사람으로

목숨부지가 최선은 아닐 터

후학들을 돌보면서

사반세기 더 밥 먹는다고

어둠이 걷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국치의 소식이 들리는 날

매천 친구처럼

절명시나 읊으면서 사라졌다면

구차하게 후회도 없었을 것을

 

 

나는 고조부와 같은 시대의 지성인도 아니고 그럴듯한 벼슬을 한 사람도 아니며 후세의 사람을 가르칠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고조부의 마음내지는 눈물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로 부터 들은 말을 참조하여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위와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해 본다. 

그날그날 어떠한 결정을 하며 살아야 될까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어쩌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각종 문헌에 있는 고조부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여 기록한 책- 직도촬약)

 

 

(고조부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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