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절

아버지의 '사모곡'

헤스톤 2014. 5. 20. 16:44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각종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러저러한 책도 많이 읽고 메모도 하면서 조상과 관련된 전기나 실록을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고조부(금사 박항래 할아버지)의 주옥같은 문헌들을 아무 생각없이 없애 버린 우리 집안이 한심하기 그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조상이나 당신과 관련된 기록에 매달렸던 같다. 귀한 자료들이 없어진 것과 관련하여 아버지가 말하는 우리 집안은 고조부의 자손 모두가 될 터이니 그 범위가 매우 넓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나의 조부는 증조부의 차남이고 아버지는 조부의 차남이니 조금 비껴 서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장손이 아니라고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를 소중하게 다루지 않은 우리 집안을 부끄럽게 여기며 후대에 고조부(梅泉 황현선생과 교분이 두텁고 直道精神으로 일관한 선비)이상가는 출중한 사람이 출현하기를 소망한 것이다.

 

내가 "아버지" 하면 기억나는 것은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과 무엇을 계속 쓰고 계신 모습이다.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책도 여러 권 내셨다. 위의 사진에 있는 아버지의 "차마 어쩌지 못한 인생"이라는 책은 돌아가시기 약 3년전에 내 놓으신 것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책이 되겠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책 내지 글을 남기는 이유는 이 책의 본문중에도 있지만 당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중의 하나가 책을 남기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다 가셨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버지는 유서를 작성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시기 직전 나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말씀하시길 "적당하게 살았다. 알맞게 살았다. 지금 가면 적당하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아버지가 영면하시기 직전 중환자실에 계실 때 나는 아버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말하였다. "아버지! 멋있게 살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책 제목이 "차마 어쩌지 못한 인생"이지만 주어진 여건하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 인생이 아닌 가 한다. 이 책에서도 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글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詩의 형식을 빌린 글도 몇 편 있다. 

 

아버지가 詩人이라고는 하지만 많은 시를 남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漢詩이기에 나도 모르는 한자가 있어서 제대로 소개하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아버지의 글들을 묶어 제대로 된 책 한권 펴 내고 싶은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74회(2001년으로 계산됨) 생일을 맞아 지으신 '오뇌시'(뉘우쳐 한탄하고 번뇌하는 시)를 이곳에 옮겨 본다.

 

懊惱詩 (오뇌시)

 

日常閒靜身唵家       늘 한가하고 조용히 집에 머무네

七十年來傀儡身       칠십평생 허수아비같이 살아 온 신세

世云棄我我忘身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나 또한 나를 잊었네

吾生無用亦無求       내 인생 쓸모없고 바라는 것도 없다

至境人間無好事       필경 이 인간 좋은 일 없을 것인데

憫然常思幾許生       민망하게 얼마나 더 살 것인지 늘 생각하네

 

 

아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전(2004년)에 어머니(나한테는 할머니)를 그리워 하며 쓰신 '사모곡'이다. 이 글은 한글로 되어 있다.

 

 

       사  모  곡

 

 

 

어머니 떠나시고 어느덧 삼십사년

바람따라 속절없이 가셨지만

세월가도 그리는 정이 더 한것은

인생이 너무 가엾기 때문입니다

 

사대부의 손부로 간택되시어

동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꽃가마 타실 때의 아롱진 꿈은

한낱 가이없는 허망한 꿈이었습니다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이 잘못이었나

어이없는 사나운 악운과 비운으로

평생 시름과 눈물로 보낸 시집은

참담한 비극의 무대이었습니다

 

모진 가난의 질곡에 얽매여

손발이 닳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자식사랑에 인생을 다 바친 어머니

애절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가난과의 대결로 기력을 잃으시고

피골이 상접되어 쓰러지신 어머니

긴 한숨을 몰아내시며 떠나시던 날

하늘도 울고 땅도 몸부림쳤나이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평생의 불행과 아픔 이제 묻어두시고

근심 걱정 놓으시고 편안하옵소서

끝까지 어머니 향수로 살 것입니다

 

오늘의 생활은 어머니의 선물이요

정성을 다하신 노력의 결정입니다

생전에 시봉 도리 변변치 못한 것을

여기 엎디어 두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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