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절

지난시절 간기

헤스톤 2008. 4. 14. 17:53

   

 

(아버지의 시비 옆에서 어머니와 함께)

 

 

(고조부 금사공의  행적비 옆에서)

 

 

 

    出  生

 

    忠淸南道  錦山郡  濟原面에서  부친 朴鍾琦(박종기,  前 濟原面長)와  모친 陸春子(육춘자)의

    남으로 태어났다.

    제원초등학교를  6학년  5월까지 다니다가  대전에 있는 가양초등학교로 전학와  졸업하였다.

    금산  제원은  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앞에 있는 냇가나  뒷동산, 내를 건너

    있는 앞산 과 두루봉 등은 꿈속에서도 그리워 하는 정다운 곳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부모님에게 많은 기쁨도 안겨드렸지만,  실망을 주기도 하였다.

    아련히 떠오르는 아름답고 소중한 시절이다.

 

     제원리 입구에 있는  "直道文化路"라는  비석과 그 옆에 있는 비석은  나의 고조부  朴恒來(박

    항래) 금사공에 관한 것이다.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신 분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으며,  매천

    황현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다.  제원초등학교의 전신인  "제남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나

    의 호를 濟南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학 창 시 절

 

 

    중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였고  다음 해에 들어갔다.  역시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재수를 했는 데도 전기에서는 낙방하였다.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부모

    님을 크게 실망시키고 커다란 불효를 저질렀다. 중학교 시험을 보는 마지막 세대(서울에서는

    무시험 추첨으로 입학하였지만, 지방에서는  시험이었음)이었다. 작은 아버지댁에서 중학교

    를 다녔는 데  밝은 색깔의 생활은 아니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가지로 매끄

    럽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부터는 자취를 하였다.

 

   머리만 믿고 공부에는 취미가 별로 없었는 데,  고1이 되던 해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접게

    되면서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책상에만 붙어 앉아 있었다. 어느 시험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하였더니 아버지는 매우 난감해 하셨다. 내

    수중에 원서대비는 커녕  서울에 올라갈 차비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책도 읽어 이것저것 간

    접경험도 많이 쌓은 유익한 시절이었지만,  집안 경제사정으  좌절을 겪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 시절이다.

 

 

   청 년 시 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십대는 아름답다. 나이상으로 인생의 황금기이다. 계절로는

     5월이며  신록의 계절이다.  대학교 1, 2학년과  군생활로  20대 초반을 보냈다. 가장 기운도

      머리회전도 빠를 때 군대생활을 한 것은 훗날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인생을 좀 더  멀

    리야 했다. 병역의무를  조금 늦추고라도 꿈을  조금만 더 크게 가졌다면 인생길은  크

    게 바 것이다. 

 

    대학교 성적도 좋은 편이었고 복학후 3학년때는 1,2학기 모두 과수석이었다. 그 때라도 눈을

    크게 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어야 했는 데  그러지 못했다. 고시공부를 하기에는 늦었다

    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집안형편상 빨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었다. 은행에 취직하기

    까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였고 꿈도 가졌

    던간이었다. 

 

 

   직 장 생 활 1

 

   약 26년간의  인생초반을 보낸 후 기업은행에 입행하였다.  맡은 업무는 어렵지 않았다.  시시

    하였고 재미도 별로 없었지만 업무지식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다른 직장도  기웃거

    렸으나, 주변의 만류로 그냥 다녔다. 직장안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였고 많은 사람을 만

    나면 세속에 물드는 기분이었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어른이 된 장점과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아 진 단점이 있었다. 특히 가족이나 친척들의 대소사에 주름이 늘어갔다. 

    무엇보다  직장생활 초반은 책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직 장 생 활 2

 

    직장생활 3년이 지날 무렵 결혼을 하였고 자식도 낳았다.  첫 아이가 잘못되어 병원을 오가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 많이 늙어 버린 것 같다.  30대 초반에 깊은 좌절을 맛 보았고 안정

     되지 못한 생활속에서 첫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그 후 둘째를 낳았고 가정의 틀을 점차 세워

     나가게 되었다.  은행 책임자로서의 생활도 제 자리를 잡아나가게 되었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게 되었으며, 여기저기 업무관련 글도 제일 많이 게재한 시절이었다.  

 

     직장 중반기에는 주로 본부부서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관리부에서는 상각, 경매, 회사정리

    절차 등의 업무를 보았고, 종합기획부에서는  대외업무나 정보 및 자본관련 업무 등을 담당하

    였다.  직장 내부의 직원들도 많이 알게 되었지만,  외부의 사람들을 더 많이 사귀면서 나름대

    로 유익하게 보낸 시절이었다.  여의도에 출입하면서 알게된 사람들이 많았고,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학원에서는 줄곧 수석을 차지하고 평점 4.5 만점중 4.29

    로 수석졸업하였다.

 

   직 장 생 활 3

   

    2002년 1월부터 한 지점의 총 책임을 맡기 시작하였다.  나 혼자 하는 업무가 아닌 탓인 지 뜻

    대 안되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운도 따라주질 않았다.  성적은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렸고,

    잠 못이게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있었다. 나의 성격상 나를 희생하여 남을 사랑하려고 노력

    하였다. 될 수 있는 한 적극적 변명없이 홀로 책임을 떠 맡으려고 하다보니  가는 길이 힘들었

    는 지도 다.  지점장은 일찍 되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어느정도 상처도 입

    었다.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물론 기쁜 일도 있지만 한 색깔이었다.

   

    직장내에서 나 나름대로  아이디어도 있고 플랜도 있었다. 건방진 말이지만  능력이나 실력도

    있고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꿈을 펼칠 수 있는 자리로 지 못했다. 한마디로  내가 몸담

    있는 회사를 멋있게 끌고 가고 싶었는 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인 생 가 을

 

    그러나 아직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어느덧 가을로 접어든 것을 부인할 순 없겠지만  이제

    부터라도 나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고 싶다. 를 힘들게 한 인간들도 감싸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실력으로 이 사회가 발전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나의 웅변과 매력을  충

    분히 발휘하며 살 수 있다면 큰 행복이 될 것이다.

  

 

 

 

 * 위에 기록한 나의 지난 시절 이야기는  2008년초에 작성한 것으로 좀 창피하기도 하고  약

   간의 껄끄럼도 있어 2011. 2월 1일이후 비공개 내지는 친구블로그에게만 공개하는 것으로

   하였더니,  일부 원성(?)도 있고 하여 다시 공개로 합니다.

   새로운 인생이 정착되면 후속편의 지난시절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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