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38

헤스톤 2025. 3. 30. 05:18

난생처음 장편소설이라는 명목으로 "悲慾(비욕)"이라는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단편소설은 몇 편 발표를 했고, 또 구상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장편소설은 아마 이 소설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장편이라곤 하지만, 쓰다가 중단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너무 장기간에 걸쳐 쓰다 보니 당초 의도했던 방향에서 약간 틀어져 있고, 기억의 한계로 어긋난 구성도 보인다. 그리고 어느 부분은 시간상 순서도 삐걱거리면서 처음 시작할 때 내고자 했던 색깔과도 좀 다르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이젠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힘을 내서라도 일단 마무리는 지으려고 한다. 이는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약 5회 이내에 이 소설을 마무리 지은 다음, 전반적으로 손을 볼 계획이다.

 

좋아요나 댓글을 다는 분들 및 아무 흔적 없이 보고 가는 누구누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추후 잘 다듬겠습니다. 

 

 

38.  꽃은 밥이 아니다

 

 

오 상무는 허 회장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오 상무 자신도 임원으로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비겁하였다. 고비 때마다 허 회장과 천 부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지낸 세월이다. 나름 이러저러한 충고를 했다고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신대홍, 손천식, 천태운 등의 경영진 세력 다툼에서도 주로 방관자로 지냈다. 특히 허 회장과 천 부회장의 알력에서는 자주 바르지 못한 편에 서기도 했다. 

약 6년 여전 입사시로 돌아가 볼 때, 천태운에게 경영 전반을 의지하고 있는 허 회장을 보며 자신도 천태운의 눈치만 살피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허 회장이 CFO 자리를 권할 때도 천태운의 눈치를 살피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천태운이 비합법적이고 상식에서 어긋난 자금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지냈다.

허 회장의 후회하는 말을 들으며 오 상무는 미안함이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허 회장에게 제대로 충고하고,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냥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물러난 자신의 비겁함을 적정함으로 포장하며 지낸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물론 제일 큰 책임은 허 회장 자신이다. 사람을 잘 못 쓴 결과이다. 한비자의 말이 떠오른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과 부하와의 이익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이익이란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하여 거기에 적합한 직무를 주어 일하게 하는 것인데 반해, 부하가 추구하는 이익이란 능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보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잘못은 허 회장이 천태운의 인화 부족과 더불어 잘못된 자금관리를 알면서도 계속 중용하다가 결국 그에게 경영 전반을 맡겼다는 것이다. 허 회장 자신에게 주는 곶감에 취해 그를 CEO 자리에 앉힌 못난 기용이 가장 큰 잘못이다. 오 상무는 자신의 비겁함을 허 회장과 천 부회장에게 돌리는 식으로 위로하며 3층 회장실에서 나왔다.    

 

 

 

오 상무는 "이제 이 회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자주 가는 연못으로 가려고 출입문을 나서는데, 출입문 옆에 못 보던 거미줄이 넓게 펼쳐져 있다.

회사의 매출이 줄고 재정상태가 악화되면서 직원도 많이 줄고, 청소하는 아줌마도 없다보니 이런 거미줄까지 생긴 것 같아 씁쓸했다. 거미줄 규모에 맞게 몸집이 큰 거미가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세를 딱 잡고 있는 것을 보니 괜히 심사가 뒤틀린다. 빗자루라도 가져와서 걷어낼까 하다가 방금 전에 공사(?)를 끝낸 것 같아 잠시 시간을 주기로 하였다. 이제  완성해 놓은 거미줄을 걷어내는 것은 거미에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후 시간이 가면서 시계의 짧은 바늘이 제일 아래로 갈 무렵 그곳에 다시 가보니 거미줄은 그대로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거미줄에 먹이가 걸려있지는 않았다. 대신 어디서 날아왔는지 크고 작은 꽃잎들만 여기저기 걸려 있다. 아무래도 이 거미는 장소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 출입문 옆에 자리를 잡은 것도 바른 선택이 아니다. 아무리 청소하는 아줌마가 없다고 해도 지나가는 직원 중 누구라도 이를 본다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그나저나 지금 이 거미는 하루 종일 굶은 듯 딱 버티고 있는 폼이 어떤 노여움을 드러내고있는 듯하다. 잠깐 보고 있는 중에 거미줄이 크게 출렁인다. 거미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자세를 잡는다. 그런데 걸린 것은 또 꽃이다. 저쪽 언덕에서 잠시 쉬고 있던 바람 한 자락이 보낸 솜털 같은 꽃들이다. 보송보송한 하얀 솜털 꽃이다. 먹이는 걸리지 않고 꽃들만 여기저기 있는 거미줄을 보고 있노라니 회사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오 상무는 심란한 상황을 다독이며 사업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임원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던 회의실을 돌아보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지나가며 회한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이곳에서 많은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토론했던 광경들이 떠올라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상무는 이곳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환율 예측을 포함한 각종 금융관련 내용을 설명하였고, 구리가격이나 자재의 원가분석 등을 토대로 한 전략을 발표하던 곳이기에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약 30여 개가 넘는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동안 수차례의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둔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이제 자신도 그만 둘 생각을 하니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오 상무는 처음 입사했을 때 이 회의실을 장 마음에 들어 했다 각 자리마다 설치된 마이크는 물론이고, PC를 비롯하여 자료를 발표하기 좋게 만들어진 각종 최신 장비들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썰렁하다. 그 장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의자들만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무엇보다 회사의 미래를 그리며 많은 임원들이 토론하던 광경이 떠올라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오 상무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회사가 겸손하지 못했다. 몸집만 키우면 만사가 형통될 줄 알고 수년 동안 내실 없이 덩치만 키운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다. 단일 제품 매출로는 일본의 S사를 제치고 세계 1등이라고 우쭐대던 직원들의 모습이 슬프게 다가온다. 거미도 마찬가지이지만 회사도 몸집이 크면 먹는 것도 많이 들어가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진다. 정상에 서면 밑을 내려다 보는 경치는 좋은지 몰라도 거래처가 요구 신제품 개발 등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알맹이없이 꼭대기에 있으면 부는 바람도 더 거세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다 상품화되는 것도 아니다. 거미도 마찬가지이다. 거미줄을 넓고 튼튼하게 펼쳐 놓았다고 먹을 것이 걸려드는 것은 아니다. 

 

때와 더불어 장소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거미줄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업도 있어야 할 위치를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곳은 아무 실속 없이 바람만 지나다닐 뿐이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 가사 일부가 생각난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산정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이었다면 비록 썩은 고기를 먹을망정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굶어죽는 판국에 도대체 세계 1등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 회사는 산정에 올라가 경치는 좋았을지 몰라도 결국 신제품 개발 실패 및 불량에 따른 적자경영을 견디기 힘들었다. 정상에 올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쾌감도 있고, 꽃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 오래 있다 보면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거미도 그렇다. 매일 아침마다 청소하는 회사 출입문 쪽에 거미줄을 쳐 놓은 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리고 아무리 넓게 거미줄을 쳐 놓았다고 해도 바람에 날려 솜털 모양의 꽃이나 걸리는 곳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꽃은 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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