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2

헤스톤 2023. 3. 25. 19:15

 2.  싱거운 대화

 

  천태운 부회장은 갑자기 무슨 할 일이 생긴 것처럼 손톱깎이를 꺼내 톡톡 소리 나게 깎는다. 자금관련 업무를 직접 총괄하는 CFO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상대해야할 빚쟁이들을 오 상무에게 떠맡기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채권자들이 몰려오면 숨기 바쁜 자신이 밉기도 하다. 따라서 오제원 상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오 상무를 지금까지 붙들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자신을 보호해줄 방패막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10년 전에도 회사는 이렇게 어려웠었다. 거의 부도 직전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참 오랜 기간 고생하였다. 그때 천 부회장의 직위는 자금담당 차장이었다. 'K 물산'이라는 중견기업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경리담당 대리로 이 회사에 취직하여 차장까지 오는데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위기를 넘기는데 일등공신이 되어 차장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이라는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는 데는 8년도 걸리지 않았다. 이 회사의 대주주인 허방진 회장의 눈에 들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닌 결과이다. 허 회장에게 충성을 다하며 지내온 세월이다. 

 

  지금 이 회사의 주인은 실질적으로 허 회장 1명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 회사 설립 시에는 5명이 주주로 있었고 허 회장의 지분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약 20년 전 회사가 제 궤도에 올라서면서 회유나 압력을 행사하여 4명의 주주들을 모두 쫓아냈다. 천태운은 허 회장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싶은 인간들은 회장의 지시 내지는 요구라고 하면서 구박을 하다가 가차 없이 쫓아냈다. 허 회장의 구질구질한 것까지 모두 맡아서 처리하다 보니 회장의 비밀도 많이 알게 되었다. 회장의 구린 곳을 많이 안다는 것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가끔 허 회장의 약점을 슬쩍 건드리면서 승진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충성심이 얇아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신처럼 떠받들며 지냈다. 다만,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사람들을 계속 잘랐더니 고속승진을 하게 되었고, 약 1년 전에는 종착역이면서 꿈에 그리던 대표이사 부회장까지 오르게 된 것이었다.

  손톱 깎는 것이 끝나갈 무렵 오제원 상무가 들어온다.

 

 

  "찾으셨습니까?"

  "아~ 예~ 추심업체 사람들 다 갔습니까?"

  "예. 갔습니다. 모두 소태씹은 얼굴을 하고 갔습니다."

  "나는 오 상무가 제일 부럽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이 회사를 떠난다고 하니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나도 떠날 수만 있다면 이 회사를 떠나고 싶습니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회사의 경영자께서~ 남아있는 직원들과 모두 힘을 합쳐 이 위기를 이겨내야지요." 

  "회사의 자금사정은 엉망인데 날씨는 정말 좋군요. 꽃 냄새도 참 좋은데~ 오늘 같은 날은 모든 것 다 잊고 그냥 필드에서 공이나 치고 싶네요."

  "저의 송별식 겸해서 이번 주말에 허 회장님과 함께 가기로 했으니 조금 참으시지요."

 

  그때 부회장의 비서인 이혜진 계장이 쭉 빠진 몸매를 자랑하며 차를 들고 온다. 봄이라는 따뜻한 계절에 맞춘 옷차림 탓인지 상체와 하체의 주요 부분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계장의 몸매는 약 150 명이 넘는 이 회사의 여직원 중에서 으뜸이다. 천 부회장은 오 상무를 앞에 두고도 엉뚱한 상상을 하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밤을 함께 보냈던 서미순 과장에 비해 키도 크고 어린 탓으로 피부도 탱탱하다. 회사가 어떻게 되건 말건 이혜진 계장과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제원 상무가 우선적으로 대금 일부라도 처리해줘야 할 업체들이라며 명단을 내민다.

  "이런 업체들은 조금이라도 결제해 주지 않으면 아마 조만간 가압류 등의 법적조치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바쁘지 않은 업체가 있겠습니까? 버텨야지요."

   

  천 부회장은 건성으로 답하며 옛날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마치 무용담처럼 말하는 내용으로 이미 수십번도 더 들은 내용이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상무는 구매팀 직원들과 회의할 시간이 되었다며 일어섰다. 오 상무는 괜히 미안하니까 잠깐 보자고 한 것을 진작부터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별로 의미있는 말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둘러 일어섰다. 

 

  오 상무는 3층에 있는 부회장실에서 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며 마음을 편하게 가져본다.  6년 전 처음 이 회사에 왔을 때 기분을 상하게 한 일부터 여러 가지 사건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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