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hink

조선 최고의 명필(4)

헤스톤 2022. 1. 18. 18:36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추사 김정희가 40대에 쓴 글씨로 위의 사진 "운외몽중첩(雲外夢中帖)"은 최고 명작이라고 한다. 위의 "운외몽중" 네 글자는 예서체의 골격에 해서체의 방정함이 곁들여져 글자 자체의 울림과 무게가 동시에 느껴진다. 한편 힘차고 유려한 행서로 써 내려간 작은 글씨들을 보면 추사는 이 무렵부터 획의 굵기에서 아주 능숙한 변화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0대에 들어서면 이런 글씨가 더욱 발전하여 글자의 기본 틀에 구양순체가 더해져 이른바 추사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추사체에 대하여는 이러저러한 평가들이 있다. 추사체는 정치적 풍랑과 오랜 유배 생활의 심회가 더해져 완성된 것이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보는 이에 따라 좀 다르게 평가하기도 한다. 필획의 굵기 차이가 심하고, 각이 지고 서툴러 보이며, 비틀린 듯한 형태로 유려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파격적인 형태로 강인하고 힘차면서, 맑고 고아하며, 정해진 법식에 구애되지 않은 독창적인 필법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추사는 맞닥뜨린 시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더욱더 불타올랐을 것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하였고, 벼슬을 하였지만, 당쟁에 휘말려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두 차례나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 오히려 학문적 열정을 더 깊게 했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은 힘들었겠지만, 학문은 경학과 고증학을 넘어 불교학까지 뻗어갔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서체인 추사체를 이룩하게 되었다. 추사체는 현대적 감각으로도 대단히 세련되고 디자인적인 요소가 충만한 서체라고 평가받고 있다.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 1844년 종이- 수묵 국보 180호

 

 

김정희는 1852년(철종 3년)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풀려나 과천 과지초당(瓜地艸堂)에 머물면서 불교에 귀의했다. 위 사진의 현판은 1856년 10월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큰 글씨 옆에는 '七十一果病中作(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라고 본문 옆에 따로 쓴 글자도 있다. 죽음 직전 불교에 기대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추사가 서예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후대에게 영향을 끼친 점이 너무 많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꾸만 길어지고 있기에 이쯤 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4.  조선 이전의 최고 명필

 

지금까지 언급한 조선의 명필 중 누가 최고냐고 묻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질문으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 글은 어차피 나의 주관이 섞인 글이기에 결론을 내리기는 할 것이다. 다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조선의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조선시대 훨씬 이전의 서예가 2명을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조선의 명필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1) 통일 신라시대 김생

 

예를 들어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이후 누가 가장 영웅이었느냐를 말하거나, 조선 이후 누가 최고의 석학이었느냐 혹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기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을 말할 때 언제부터라는 시점이 대두된다. 이와 비슷하게 서예가로 명필의 시점을 말하려면 통일 신라시대 김생부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생의 글씨)

 

김생은 711년(성덕왕 10년)에 태어나 791년(원성왕 7년)에 사망(백과사전엔 사망연도가 미상)하였다고 하는데, 만 80년을 살았으니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엄청 장수한 셈이다. 김생은 해동 書聖(서성)으로 불렸다. 서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마 서예가로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대부분의 서예가들은 서성이라고 하면 王羲之(왕희지)를 떠올린다. 

여하튼 김생이 얼마나 글씨를 잘 썼느냐에 대하여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 48 열전 제8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 사람의 형편이 구차하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즉, 그의 글씨를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할 정도로 왕희지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왕희지는 현재까지도 최고의 서성으로 불리며, 김생보다 약 400여 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 부처를 좋아해 장가를 들지 않음)’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眞蹟: 실제의 유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 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할 정도였다.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광종 5년(954)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運筆: 붓 놀림)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이상 김생과 관련하여 백과사전을 참고하였다.

 

(김생 글씨-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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