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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명필(2)

헤스톤 2021. 12. 21. 08:19

3. 부분 서평

(1)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잘 알다시피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훗날 세조가 된 그의 형 수양대군에 의해 역사의 패배자가 된 탓으로 남아있는 그의 서예작품은 거의 없다. 국보인 '소원화개첩'에서 그의 글씨를 볼 수 있고, 몽유도원도에 실린 그의 발문 등에서 씩씩한 해서와 유려한 행서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소원화개첩)

 

그는 서예, 시문, 그림에 뛰어나 '三絶(삼절)'이라고 불렸으며, 그의 글씨를 보고 명나라 황제도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인 예겸과 사마순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맹부의 필법을 바탕으로 ‘호매한 필력이 대단했으며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이라는 극찬(용재총화에 있는 내용)을 비롯하여 그의 글씨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다.

당시 그가 문화계의 중심인물이 된 것은 뛰어난 서예나 문장이 당연히 뒷받침이 되었겠지만, 왕자라는 신분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주변엔 글깨나 쓰고 짓는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결국은 그의 주변에 모이는 많은 이들이 수양의 눈을 거슬리게 하여 명을 재촉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고려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체를 따랐으나, 이를 나름대로의 필법으로 발전시켜 중국 사신들로부터는 "조맹부에게 배웠으나, 조맹부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힌 재송엄상좌귀남서)

 

 

(2) 양사언

 

출생순에 따라 봉래 양사언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1517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하였다. 먼저 '봉래'라는 호는 여름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포천지역의 백운산 봉래굴에서 따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양사언이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지은 것만 봐도 그가 금강산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양사언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아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태산가' 시조를 지은 사람이다. 

그는 문장가로써뿐만 아니고 초서에 능했다고 하는데, 그의 웅혼한 초서체의 글씨와 작위성 없는 한시는 자유분방하고 천의무봉 그 자체라고 하였다. 고전번역서 '성호사설 12권'에서는 봉래 양사언의 글씨에 대하여 '표표하여 마치 하늘에 치솟고 허공을 걸어가는 기상이 있으니 그 글씨 속에 仙骨(선골)이 있음을 속일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농암집 23권에서는 "蓬萊楓嶽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 여덟 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용이 꿈틀대는 것 같은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고 극찬을 하였다. 

 

(양사언의 초서로 미친듯이 써 내려갔다고 하여 그의 글씨를 狂草체라고도 한다 )

 

 

그의 글씨와 관계없이 여담이지만, 양사언 및 그의 어머니와 관련한 이야기는 KBS의 '시간여행 역사속으로'를 비롯하여 여러 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다. 그런 프로를 볼 때 솔직히 알고 있던 것과 조금 다르거나 가감한 내용에서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유명한 태산가가 양사언의 어머니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렇게 제작되었다고 이해하려고 한다. 

아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택한 그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에 대하여는 이견이 없다. 다만, 문헌 설화에 나오는 내용들이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에 대하여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사실 기록이란 것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록이 과연 진실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좀 더 미화하기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얼 출신들에 대하여 엄격하였던 상황을 고려할 때, 남편을 따라 자결을 함으로써 첩의 자식이 정실 자식으로 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일가친척들은 물론 이웃들도 양사언이 본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 것이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사람이 그 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출신이 바뀐다는 것은 약간 어설프게 느껴진다.

나의 생각으로는 양사언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양사언의 어머니가 전처의 자식(양사준)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면서 자신이 낳은 두 아들과 함께 훌륭한 문장가로 키웠기에 그의 어머니를 무조건 첩이라고만 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다. 만약 왕보다 왕후가 일찍 죽어 왕이 후궁을 새 왕후를 맞이하면 그 왕후는 정실일까, 계속 첩일까? 물론 양사언의 어머니가 양반 출신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 것도 또 어떻게 작용했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한석봉 어머니 못지않게 그의 어머니는 훌륭한 어미니의 표상이다. 이런 어머니의 덕택으로 양사언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대단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고, 조선 4대 명필로 우뚝 섰다고 본다. 

 

(양사언의 초서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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