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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명필(3)

헤스톤 2022. 1. 1. 18:10

 

(3) 한석봉

 

한석봉은 양사언보다 26년 후인 1543년에 태어나 1605년에 사망하였다. 양사언과는 약 40여 년을 같은 시대에 살은 셈이다. 그는 본명인 한호보다 한석봉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서체에 능한 최고의 명필가로 조선에서의 평가보다는 오히려 중국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요즘 말로 하면 중국에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황해도 석봉산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를 石峰(석봉)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엄청난 노력가였다. 글씨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박연폭포가 먹색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그렇게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분명 탁월한 재능도 가졌음에 틀림없다. 

 

한석봉은 진사과에 합격하였지만, 과거에 급제한 것은 아니었다. 글씨가 워낙 훌륭하여 승정원 사자관에 임명되어 당시 국가 주요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도맡았다. 무엇보다 당시 국왕을 잘 만난 것도 그의 큰 운이라고 할 수 있다. 명필이 명필을 알아본다고 조선 국왕 중에서는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선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것을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한석봉의 글씨는 매우 유명하였기에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이나 장수는 한석봉의 글씨를 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외 당시 명나라 최고 문학가였던 왕세정 같은 인물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라고 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등 여러 기록이 있다. 한석봉은 서예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왕희지(진나라 서예가), 안진경(당나라 서예가) 등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대서예가들과 동급으로 대접받았다. 명나라 서화가 주지번은 "그의 글씨는 왕희지, 안진경과 우열을 다툰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한석봉의 행초서)

 

한편 조선 사대부 중에서는 그를 글씨나 좀 쓰는 기능인이라고 헐뜯는 이가 많았다.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후대에서도 폄하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글씨는 예술성이 떨어지고, 개성이 없는 글씨라고 하면서 살아있을 때 명필로 크게 인정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심지어 불을 끄고 쓰는 글씨와 어머니의 떡썰기 일화가 너무 유명하여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하면서 절하시키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씨를 보고 엄지를 올리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분명 대단한 명필이다. 그가 써서 전해져 오고 있는 수많은 글씨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의 글씨는 현재까지도 각종 국가문서에 표준서체로 삼을 정도로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글씨체이다. 그래서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누가 한 말인지 "한석봉의 글씨는 표준을 따라 하지 않는다. 그가 쓰는 글씨가 곧 표준이다."라는 말이 와닿는다. 그는 평범한 서체를 쓴 것이 아니다. 평범함으로 남을 서체를 만든 서예가이다.

 

(한석봉의 글씨)

 

(4) 김정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나 1856년 경기도 과천에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조판서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입적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11촌 조카이자 영조가 애정을 쏟은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증손자로, 그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조정에서 축하를 보낼 정도로 집안의 권세가 대단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금수저 출신이다. 양사언이나 한석봉과는 출신부터 다르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등이다.

 

그를 묘사하는 언어는 너무 많다. 서예가, 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 등등으로 조선시대 문화예술과 학문에 있어서 최고의 아이콘이다. 그를 조선 최고의 엘리트,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도 한다. 한편 그는 병조참판이나 성균관 대사성 등의 벼슬도 지냈지만, 제주도에서 9년, 함경도에서 2년의 유배생활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추사의 행서)

 

그는 대단한 노력파였다. 명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고 엄청난 노력은 필수라고 본다. 한석봉도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김정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글이 있다. 추사가 친구 권돈인(조선 후기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서화가, 문신)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평생 10개의 벼루를 밑창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는 구절이다. 글씨를 얼마나 썼으면 벼루 10개가 구멍이 나고, 붓 1,000자루가 몽당붓이 된단 말인가. 그 정도의 연마 없이 묵향을 즐겼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 현판)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만들고, 세한도라는 그림을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름을 떨친 학자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정희에 대해 아는 것은 딱 여기까지이다. 그 이상 김정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무엇을 연구했고, 왜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우선 다 아는대로 역대의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들을 모아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만들었다. 그림에 있어서는 죽란(竹蘭)과 산수(山水)를 잘 그렸는데, 사실(寫實)보다 品格(품격)을 위주로 하여 선미(禪味)가 풍기는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또한 금석학(金石學)에도 조예가 있어, 1816년 무학대사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의 비봉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했다. 그의 고증과 해석으로 함경도 함흥 함초령의 진흥왕 순수비도 찾을 수 있는 등 고증학, 금석학의 대가로써 역사 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역사적인 저술을 비롯하여 실학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이면서 역사적인 저술 등으로 그는 사실 당대보다도 후대에 더 큰 인정을 받았다. 

 

* 추사 선생에 대한 글이 너무 길어져 다음 회에 계속 이어 쓸 예정입니다.

 

(추사의 글씨-계산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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