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불편한 자유

헤스톤 2020. 11. 23. 14:15

언제부터인지 불규칙의 자유로운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생활을 이어온 것 같은데, 이제 규칙은 어디로 가고 불규칙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런 불규칙은 매일 출근하던 회사를 퇴직한 후 실업자 생활을 하거나 출근을 하더라도 일주일에 2~3일 정도만 다니면서 시작된 것 같다. 출근도 요일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 리듬이 헝클어진 상태에서 자유 아닌 자유를 누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간혹 느끼는 것이지만, 때론 자유보다 구속이 편하다.

우선 잠자는 것이 제 멋대로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밤 11시에 취침하고, 아침  6시에 기상이라는 어떤 룰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그야말로 완전 제멋대로이다.

최근엔 초저녁에 몇 시간씩 잠들 때도 있다. 그리고 밤 12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깨어나서는 TV 앞에 앉아 있거나 책을 본다, 어떤 경우는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거나 침대 속에서 뒤척거린다. 그리곤 새벽녘에 다시 잠이 든다. 물론 이것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밤늦게까지 아예 잠이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불규칙 그 자체이다. 이런 불규칙의 자유로운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군대처럼 정해진 생활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면서 집사람의 생활패턴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과 반대로 집사람은 예전보다 밖으로 도는 시간이 늘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골프를 치러 다니기에 바쁘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 서예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각종 작품집에 나와 있는 난, 대나무, 매화, 국화 등의 사군자를 그리다 보면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른다. 붓을 들고 몇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간혹 저녁을 먹고 붓을 들었다가 밤 12시를 넘기는 경우도 많다. 며칠 전에는 오후 9시쯤부터 王維(왕유)의 終南別業(종남 별업)을 비롯한 漢詩(한시)를 해서체, 예서체, 행서체 등으로 한참 쓴 후, 대나무와 매화를 그리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냥 시간이 많이 갔다고만 느꼈을 뿐으로 자정쯤 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는 어느덧 3시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여유 시간이 많다고 글을 자주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 다닐 때보다도 쓰지 않는다. 아마 밋밋한 생활 탓으로 마땅한 글의 소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의 종자라도 구할까 하는 마음으로 가끔 집 근처에 있는 둘레길을 걷곤 한다.

 

오늘도 점심 식사 후 둘레길을 약 1시간 정도 걸은 다음, 샤워를 한 후 붓을 들었다. 최치원의 "秋夜雨中(추야우중)"이라는 글을 썼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엔 나를 알아주는 이 없네

창밖엔 밤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엔 만리로 내닫는 이 마음

 

물론 내 수준을 알기에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은 없지만,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고뇌라거나 세상으로부터의 단절 등을 느끼게 하는 시로 그냥 내 처지가 오버랩된다. 가을이나 밤, 비 등으로 구성된 시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 쓸쓸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왕유나 이백 등의 다른 漢詩(한시)를 만나 붓글씨를 쓰면서 그 속으로 빠져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붓을 들고 한참 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둘레길을 갔다 온 후 일찍 붓을 들은 탓인지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가지는 않았다. 7시가 되려고 한다. 평소 같으면 집사람으로부터 진작에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조용하다.

집사람은 오전에 골프 운동을 갔다 오더니 안방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다. 어젯밤에 잠을 많이 설친 탓인지 내가 붓을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시작하여 아직도 자고 있다. 깨우기도 그래서 혼자 저녁을 먹으려고 국 냄비에 가스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낸 후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없다. 이때의 허망함은 아마 느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자고 있는 집사람을 깨우기도 그래서 쌀을 씻어서 밥솥에 앉힌다. 이런 나의 모습이 이젠 낯설지도 않다. 주방에서 떨그럭거리는 소리에 집사람이 잠에서 깼다.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어~ 벌써 7시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나한테 전화도 여러 통 왔었겠네?"

"전화는 무슨 전화? 전화벨이 울린 적이 없는데."

"큰일 났네. 이거 어쩌지. 너무 늦었네."

그러면서 집사람은 정신없이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대충 물만 바르고 나온다.

"아니, 뭣 때문에 그렇게 서둘러?"

"어제에 이어 오늘 골프 월례회가 있는 날인데, 늦었네. 아무리 늦어도 이곳에서 6시 20분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아니, 오늘 운동 갔다 오지 않았어? 그리고 이 밤중에 또 무슨 모임이야?"

"아니, 오늘? 그럼 지금 아침이 아니야?"

정신없이 서두르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집사람은 이틀 연속으로 운동 약속을 하였고, 오늘 운동을 다녀온 후 오후 3시 무렵부터 정신없이 자더니 갑자기 일어나 저녁 7시를 아침 7시로 착각한 것이었다. 만약 저녁이 아니고 아침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면 좀 더 고소함(?)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최근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불규칙적인 생활이 계속되면서 예전과 다르게 어수선한 느낌이다. 물론 규칙적인 생활이 불규칙적인 생활보다 올바르다거나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불편해진다. 몸에서 불편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그리고 어떤 분야의 실력이나 인격이라는 것도 너무 자유로운 상황에서는 절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짐을 해본다. 하루에 고정적으로 해야 할 식사, 잠, 서예, 그림, 독서, 운동 등에 대하여 나름대로 요일별 시간표를 작성한 후 이를 실행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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